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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을 뜻하는 영어 렌트(Lent)는
고대 앵글로 색슨어 Lang에서 유래된 말로,
독일어의 Lenz와 함께 ‘봄’이란 뜻을 갖는 명칭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40일간의 기념일’이라는 뜻의 희랍어인
‘테살코스테’를 따라 사순절로 번역한다.이는 부활주일을 기점으로
역산하여 도중에 들어있는 주일을 뺀 40일간을 주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 묵상하며 경건히 보내고자 하는 절기이다.
40이란 수는 예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받으심,
40일간 시내산에서의 모세의 금식,
이스라엘의 40년간의 광야 생활,
예수의 부활에서 승천까지의 40일 등과 같이
성경에 여러 번 고난과
갱신의 상징적 기간으로 등장한다.
이에 고난 주간을 포함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인의 구속을 위해 수난을 당하신 사건에
담긴 구속사적의의를 살펴보며
자신의 신앙을 재 각성하고자
비교적 긴 40일간의 절제 기간을 갖는 것이 바로 사순절이다.
사순절은 항상 수요일부터 시작되는데,
이 날은 재의 수요일, 성회 수요일, 속죄일 등으로 불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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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왜 그렇게 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나요?
예수님의 십자가 상에서의 고난은 죄의 파괴적인 성격, 하나님의 진노, 인간의 잔인함, 사탄의 증오 등을 보여 주었습니다. 인자가 인류의 구속자가 되기 위하여, 갈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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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조용기 목사 설교] 예수님께서 당하신 3대 고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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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겪으신 삼중 고난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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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예수님 의 고난
- Author: 서초예일교회 Seocho Yaeil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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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9. 3. 16.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0kukLUyG-8Y
예수님은 왜 그렇게 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나요?
질문
예수님은 왜 그렇게 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나요?
답변
답변: 예수님은 재판과 고문과 십자가를 통하여 가혹하게 고난 당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7장; 마가복음 15장; 누가복음 23장; 요한복음 19장). 그분의 고통은 육체적인 것이었습니다: 이사야 52:14에서는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라고 선언합니다. 그분의 고통은 정신적인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마태복음 26:56). 그분의 고통은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고린도후서 5:21). 예수님은 온 세상의 무거운 죄의 짐을 홀로 다 지셨습니다 (요한일서 2:2). 예수님은 그 죄 짐으로 인하여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복음 27:46) 라고 절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혹한 육체적 고통은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고 그 값을 치르기 위해 죽으심으로 더욱 가중 되었습니다 (로마서 5:8)이사야는 예수님의 고난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이사야 53:3, 5). 이 구절은 예수님의 고난의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우리의 나음과 우리가 평화를 위하여.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고난은 확정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누가복음 9:22; 17:25 참조). “-해야 하리라”는 말에 주목 하십시오 – 고난을 받아야 하고,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시편 22:14-18은 메시아의 고난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이 예언과 더불어 다른 많은 예언들이 성취되기 위하여, 예수님은 고통 당하셔야 했습니다.예수님은 왜 그렇게 심하게 고통 당하셔야 했을까요? 죄인을 위해 죄없는 자가 죽어야 하는 원칙은 이미 에덴 동산에서 세워졌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그들의 수치를 가리기 위하여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3:21) – 에덴 동산에 피가 뿌려진 것입니다. 후에 이 원칙은 모세의 율법에서 발전 되었습니다.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레위기 17:11; 히브리서 9:22 참조).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요한복음 1:29)이셨고, 고난은 희생 제사의 일부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고통 당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적인 고난은 우리의 죄값을 치르기 위한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우리는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고린도전서 1:19) 구속을 얻었습니다.예수님의 십자가 상에서의 고난은 죄의 파괴적인 성격, 하나님의 진노, 인간의 잔인함, 사탄의 증오 등을 보여 주었습니다. 인자가 인류의 구속자가 되기 위하여, 갈보리에서 인간은 가장 잔인한 일을 인자에게 가하도록 허락된 것입니다. 사탄은 그가 위대한 승리를 이루었다고 생각했을 수 있지만, 인자는 오히려 십자가를 통하여 사탄과 죄와 죽음을 이겨 내셨습니다.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요한복음 12:31; 골로새서 2:15 참조).예수님은 모든 믿는 자들의 구원을 보장하기 위하여 고난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그분은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누가복음 22:42). 고난의 잔은 그리스도에게서 옮겨지지 않았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그 잔을 마시셨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겪으신 삼중 고난
제목 : 예수님이 겪으신 삼중 고난
(The Triple Sufferings of Christ)
성경 : 마 27:27-46
27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31.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32.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33.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34.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35.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36.거기 앉아 지키더라
37.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38.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9.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45.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6.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고난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한 주간은 우리 주님께서 예루살렘에서 공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을 십자가 고난으로 마감하신 사실을 기념하며, 주님의 고난을 더 깊이 묵상하고,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도를 배워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우리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짐을 지시고 자원하여 원수들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셨고,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인간이 만들어 낸 최악의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이 고난의 죽음을 통하여 주님은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셨고, 또한 사망을 이기고 부활·승천하심으로 만유 위에 영광스럽게 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올라가시던 골고다 언덕으로 함께 올라가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감당하신 고난과 고통의 크기와 무게를 감히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봅시다. 십자가 사건을 다루고 있는 성경의 기록은 감정적인 표현을 최대한 절제하고 있지만, 구절 하나 하나가 깊은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사실 주님이 경험하신 십자가 고난의 깊이를 우리 같은 어리석은 인간들이 어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현대교회는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 너무 피상적인 게 아닌가 싶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말로는 십자가 고난을 언급하지만, 우리의 삶에 찾아오는 작은 어려움들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깊이 묵상하는 시간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세상의 모든 고난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역사적 유산을 남깁니다.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A. Toynbee)는 세계 역사상의 우수한 문화와 문명을 ‘고난과 역경의 소산’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의 십자가 고난은 인류를 위한 모든 고난 중에서 가장 유익한 고난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사상 최대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만큼 고통의 크기도 컸습니다.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은 육체와 정신과 영혼에 고통을 당하는 전인적인 고난, 삼중적인 고난이었습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겪으셨던 십자가의 삼중 고난을 되새겨 보면서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1. 십자가 위에서 양손 양발에 못 박히심 (= 육체적인 고난)
35절=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고난은 극심한 육체적 고난 이었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땅에 누어진 십자가에 예수님을 눕힌 후, 양손과 양발에 사정없이 대못을 박아 고정 시킨 다음, 십자가 형틀을 수직으로 세웠습니다. 어마어마한 육체적 고통이 지속적으로 온 몸에 엄습해오는 형벌입니다.
1세기 로마시대에 십자가 형은 극형중의 극형이었습니다. 주로 반역자나 극악한 살인자들에게 가해지던 형벌이었습니다. 교수형이나 단두대형은 육체적인 고통을 크게 느끼지 못하는 사형법임에 반하여, 십자가형은 육체적인 고통을 최대로 느끼면서 몸부림치며 죽게 하는 사형법입니다. 그래서 시세로 는 이 십자가형을 ‘가장 잔인하고 소름끼치는 사형법’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형의 시행과정은 세 단계 로 진행되었습니다.
첫째, 십자가형에 언도된 죄수를 빈사상태에 이를 정도로 채찍질합니다.
둘째, 자신이 못박힐 십자가를 직접 지고 현장까지 가게 합니다.
셋째, 죄수의 옷을 벗기고 죄패를 목에 걸고 십자가에 못박아서 고통 가운데 서서히 죽어가게 하다가, 죄수의 다리를 꺾어 소생의 가능성을 배제해서 완전히 죽게 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전 과정을 다 겪으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흘려 기도하신 주님은 밤새도록 끌려다니시면서 심문받고 군병들에게 채찍으로 린치를 당하는 동안 이미 육체적인 에너지를 소진하셨습니다. 골고다로 올라가는 길에서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갈 육체적인 힘마저 없는 상태였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를 쏟으셨습니다. 여기에다 주님은 창으로 옆구리를 찔려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결코 쉽게 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1000년전 구약의 다윗은 시편 22편에서 이러한 주님의 고난에 대해 상세히 예언하고 있습니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시 22:14-16).
여러분, 예수님께서 왜 이처럼 엄청난 고통의 잔을 마셔야만 했습니까? 자신의 죄 때문입니까? 그분에게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할 잘못이라도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죄 때문이요, 우리의 허물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때문에 고난의 십자가, 저주의 십자가를 자원하여 짊어지셨습니다. 주님은 이 육체적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본문 33절 이하를 봅시다.
33절=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34절=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여기 ‘쓸개 탄 포도주’는 이미 쓸개가 포도주에 오래도록 담겨 있어서 그 효과를 내고 있는 상태임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매우 쓴 맛을 내게 된 것으로, 마취 효과 가 있어 죄수들에게 고통을 완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져 왔습니다. 로마 군병들은 죄수를 십자가에 못박을 때 고통을 덜 느껴 몸부림치며 반항하는 것을 막기 위해 포도주를 마시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혀끝으로 맛보신 다음에 거절하셨습니다. 대못에 박힌 손과 발에서 오는 엄청난 고통, 그리고 깊이 박힌 가시 면류관으로 인해 전달되는 찢어질 듯한 머리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경감시키는 데 그 포도주가 도움이 될 수 있었으나, 주님은 마시지 않으셨습니다.
본문의 동사가 미완료형(에델렌)이 쓰인 것으로 보아, 마시우려는 로마 군병들과 마시기를 거절하시는 예수님 사이의 실랑이가 한동안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만일 우리가 주님의 처지라면 어찌했을까요? 아마 그 마취 포도주를 좀더 달라고 애걸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시기를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그 거부의 의미는 십자가 고통을 고스란히 당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그 고통을 온전히 감당해야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궁극적 목적인 인류 구속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들이 겪는 고통과 죽음의 공포를 몸소 체험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영원한 구주요 중보자로서 성도들의 고통을 이해하시고 또 위로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모든 육체적 고통을 친히 다 당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처럼 극심한 육체적인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가 영생의 축복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님의 고난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의 십자가를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항상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늘 주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다시는 죄의 자리에 서지 않도록 성령의 능력에 힘입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멸시와 조롱을 당하심 (= 정신적인 고난)
39, 40절=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예수님은 지나가는 자들로부터 멸시와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머리를 흔드는 것은 심한 조롱의 표현입니다(시 109:35). 그들은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며 신음하고 있는 예수님을 향하여 온갖 욕설과 비방과 희롱으로 모독적인 말을 퍼부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고난은 육체적인 것일 뿐 아니라 상상하기 어려운 정신적인 고난을 포함합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 그들은 예수님을 비하하고 조롱하기 위하여 떠들었지만, 오히려 그 말은 놀랍게도 실제적으로 성취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육체를 성전으로 말하였으며(요 2:21), 그 성전 된 육체가 지금 허물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 이 말은 일찍이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던 마귀의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람 속에 있는 공명심을 이용하여 예수님의 사역을 좌초시키려는 마귀의 계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시고 이적을 행하시며 천국 복음을 전하신 것의 대가는 오직 모욕과 손가락질 뿐이었습니다.
41, 42절=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당시의 종교지도자들도 한결같이 예수님께 희롱을 가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미워하던 예수에 대한 십자가의 처형이 이루어지자 마치 어린아이가 천박하게 장난을 치듯이 계속 조롱하였습니다.
실로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던 존재인 나사렛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예수가 더 이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을 것으로 확신하고 마음껏 그를 비웃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 여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을 가리키는 명칭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표현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현보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보내신 왕’이라는 의미가 보다 더 잘 살아나는 표현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이런 표현을 한 것은 예수를 더욱 조롱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들의 조소 섞인 표현은 아이러니칼 하게도 진정한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정신적인 고통은 이루 말로 표현할 길이 없을 만큼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시편 22편에는 메시야가 당할 정신적 고난과 관련하여 예언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시 22:6-8).
군인들은 예수님의 겉옷과 속옷을 모두 벗기고, 그 옷들을 제비뽑아 나누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벌거벗긴 채 만인이 보는 앞에서 나무에 매달리셨습니다. 수치심과 모욕감은 이루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그뿐입니까? 주님의 좌우에는 흉악한 강도들이 달렸습니다. 원수들은 엉터리 재판을 정당화하기 위해 예수님을 두 강도의 두목인 것처럼 처형 현장을 꾸민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스승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3년 동안 그토록 많은 말씀과 사랑의 수고를 기울여 가르쳤건만, 마지막 순간에 스승의 곁에서 용감하게 당국자들과 맞서는 제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단지 갈릴리에서 따라온 소수의 여자들만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비참한 운명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여인들이 눈물짓고만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여인들 중 주님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도 있었습니다. 아들이 나무에 달린 채 숨을 헐떡이며 피를 흘리고 있는 십자가 아래에서 창백한 얼굴에 거의 혼절 직전까지 이르런 주름잡힌 여인의 통곡하는 모습이 주님의 마음을 갈래갈래 찢어놓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겪으신 정신적인 통증 을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분이 감내해야 한 수치심과 모욕감은 인류 구원의 대업을 향한 주님의 결단 없이는 결코 참아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능히 자기를 구원하고 조롱하는 군병들과 무리들을 제압하실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모욕과 조롱, 모든 정신적인 고난을 인내로써 참으시며 감내하셨습니다. 왜 입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정신적 고난을 참으신 희생과 인내를 보이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결코 죄에서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정신적 고난을 이기지 못하셨더라면 우리 또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극심한 정신적 고통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정신적 고통을 받고 있는 분은 안 계십니까? 더 큰 고통을 겪으신 예수님께 아뢰십시오. 주님의 평안과 위로가 함께하실 것입니다. 고난 절기에 우리 주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3.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으심 (= 영적인 고난)
46절=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또 하나의 고난은 영적인 고난이었습니다.주님의 영적 고난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고난이었습니다.
주님은 골고다 언덕 위 십자가 상에서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에 이르기까지 거의 여섯 시간동안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신 후 운명하시기 직전에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무슨 뜻입니까? 엘리야에게 구원을 호소하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이 말씀은 시편 22:1의 말씀대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것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의 절규였습니다. 주님은 인류의 죄 짐을 지시고 하나님 앞에서 죄값을 치루셨고, 이 때 하나님 아버지의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고통을 이렇게 표현하셨던 것입니다.
본문 45절에는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였다고 했습니다. 온 땅에 임한 어두움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예수님의 영적 고난을 상징합니다.
솔직히 우리는 주님께서 이때 받으신 영적 고통을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창세전부터 성부 하나님과 더불어 완전한 하나를 이루며 영교해 오셨습니다. 아버지 안에 아들이, 그리고 아들 안에 아버지께서 계셨습니다.
그런데,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최악의 경험을 하게 되셨고, 이 무서운 영적 고통을 아들은 어둠 가운데서 오직 홀로 감내해야만 하셨습니다. 이 고통은 다른 어떤 육체적 정신적 고통보다도 크고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처럼 주님은 십자가에서 전인격적이며 총체적인 고난 을 당하셨습니다. 육체적 고통만 당하신 것이 아니라 정신도, 마음도, 그리고 영적으로도 큰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흔히 십자가 고난이라 하면 손과 발이 못박히고 옆구리가 창에 찔린 육체적 고난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고난은 더 크고 심대했습니다.
주님은 죄 없으신 분으로 극악한 죄인으로 취급되어 멸시와 조롱을 당하시고 죄인들의 손에 의해 죽어야 하는 정신적 고통과 하나님께 버림당하는 영적 고통까지도 당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고난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었습니다. 새 생명을 주신 주님의 은혜는 측량할 길이 없을 만큼 크고 넓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은혜에 감격하여 평생 십자가만을 알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십자가만을 자랑하기로 결단했고, 십자가만을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에게도 이러한 고백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나타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성도 여러분의 삶 위에 넘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멘 —
구약에 예언된 예수님의 고난
사순절 기간입니다. 이제 다음주면 고난주간이 시작되죠. 이 기간동안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아파하심을 배워나가시길 바랍니다.
◈ 다음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예수님의 고난에 관한 성경 구절들입니다.
1. 은 30에 팔릴 것(마태복음 26:15, 27:3)
구약 – 스가랴 11:12
2. 매맞고 침뱉음 당함(마태복음 26:67, 누가복음 22:6)
구약 – 이사야 50: 63
3. 가룟 유다의 배반(요한복음 13:18)
구약 – 시 편 41: 9
4. 손발이 찔리심(누가복음 33:33, 요한복음 20:25)
구약 – 시 편 22:16
5. 옷을 제비 뽑음(요한복음 19:23-2)
구약 – 시 편 22:18 4
6. 심장이 찔리울 것(요한복음 19:34)
구약 – 시 편 22:14
7. 뼈가 부서지지 않음(요한복음 19:33)
구약 – 시 편 34:20
8. 십자가상에서 목마르심(요한복음 19:28-30)
구약 – 시 편 69:21
9. 쓸개탄 포도주(마태복음 27:34)
구약 – 시 편 69:21
10.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누가복음 23:46)
구약 – 시 편 31: 5
11. 강도와 함께 못 박히심(마태복음 27:38, 마가복음 15:27)
구약 – 이사야 53:12
12. 부자의 무덤에 장사됨(마태복음 27:57-60)
구약 – 이사야 53: 9
13. 승천하심(사도행전 1:9)
구약 – 시 편 68:18
마26:36-46 예수님의 고난에 어떻게 동참할 수 있는가?
예수님의 고난에 어떻게 동참할 수 있는가?
2018 고난주간 설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마26:36-46)
반장이 대표로 받는 벌
저희가 학교 다닐 때에는 간혹 학급 전체가 잘못한 일을 선생님이 반장 혼자에게 대표로 벌을 주는 일이 종종 있었다. 잘못한 행위나 잘못한 학생의 숫자만큼 야구 방망이로 엉덩이를 맞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저의 심정이 참 착잡했던 기억이 있다.
반장은 아무 잘못한 것이 없었고 오히려 선생님 지시대로 조용히 자습하자고 독려했다. 그런데도 억울하게 혼자 벌을 받으니 참 불쌍하고 또 우리 대신에 벌을 받으니 고맙다는 것이 물론 그 첫째 반응이었다. 문제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내가 벌을 안 받으니 다행이라는 이기적인 생각이 들었다. 또 반장이니까 당연히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당하는 고통이라고 여겼다. 내가 실력과 지도력이 모자라 반장 선거에서 떨어진 것이 천만다행이었다고 여겨졌다. 심지어 다음에 잘못을 해도 반장이 또 대신 맞아줄 것이 예상되니까 잘못에 대해 반성도 심각하게 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런 식으로 벌을 내리는 선생의 인격이 의심스러웠고 도무지 불합리 불공평하다고 여겼다. 그날 아침에 부부싸움 한 화풀이를 그렇게 하나도 싶었다.
금주는 교회 절기상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고난주간이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는 밤새도록 한숨도 주무시지 못했다. 대제사장, 빌라도, 헤롯, 다시 빌라도의 법정에서 네 번이나 재판을 받았다. 유대관원들과 그 하속들 또 로마 군병들로부터 온갖 조롱 멸시를 받았고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채찍으로 맞았다. 완전히 탈진하여서 통상적으로 사형수가 지고 가야하는 십자가 나무를 구레네 시몬이 대신 져주었다. 결국 인간이 고안해낸 처형 방안 중에 고통이 최고로 극심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운명하셨다.
신자는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회상하며 이번 주를 경건하게 보내야 하는데 한 가지 우려되는 사항이 있다. 혹시라도 반장이 내 대신 벌을 받는 모습을 보는 불신자 시절의 저와 같은 심정으로 보내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주님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연민의 정으로 바라보고 또 그와 동시에 내 대신 벌을 받아주어서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 든다. 여기까진 괜찮다.
내가 하나님께 그런 참혹한 형벌을 받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라고 안도하고 치우는 것은 아닌가? 또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니까 당연히 내지는 어쩔 수 없이 그런 벌을 받아야지라고 여겨지지는 않는가? 나아가 내가 목사나 선교사가 되지 않고 일반 성도로 남아서 세상의 핍박을 받지 않고 내가 희생할 걱정이 없어 잘 됐다는 생각까지 드는 것은 아닌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 과거의 모든 죄는 물론 앞으로 지을 죄 값까지 다 감당하셨다고 한다. 천국입성은 보장되었다. 그래서 세속의 쾌락과 죄들을 아직은 더 즐겨도 되고 옛 습성을 구태여 버리지 않아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으며, 심지어 습관적으로 알게 모르게 짓는 죄의 회개도 천천히 미뤄도 되겠다고 여겨진다면 그야말로 큰일이다.
물론 대부분의 신자들이 고난주간에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기억도 하지 않을 만큼 나태하거나 이기적이거나 불경스러운 반응은 보이지 않는다. 진심으로 그 은혜에 감사는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당하신 육체적 고통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또 그렇게 하는 성경적 근거로 마지막 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오늘의 본문을 든다. 주님은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간구하셨다. 그러나 당신의 원대로가 아니라 결국은 아버지 뜻대로 순복할 수밖에 없었다고 쉽게 판단하고선 고난주간에 십자가 처형의 고통에만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근심으로 가득 찼다는 뜻은?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 연약한 육신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주님도 십자가 처형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참혹한지 잘 아셨다. 메시아로 오신 주님으로서도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염려했던 것은 분명하다. 또 일차적으로 그렇게 해석한다고 해서 큰 무리는 없지만 많이 부족한 면이 있다.
우선 38절을 다시 자세히 보라.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했다. 죽는 것이 너무 염려되어 크게 고통스럽다고 말하지 않았다. 마음의 고민이 너무 심해서 죽을 정도라는 것이다. “죽게 된 것”은 고민이 너무 크다고 그 세기를 최고조로 강조하는 수사법이지 죽음 자체나 그에 대한 고통을 의미하는 언급이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실제로 고민했던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야 한다. 물론 십자가 처형의 고통도 고민거리의 하나일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죽음은 기정사실이 되어 있는데 죽음이 너무 고민스러워 죽을 정도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불합리한 진술이다. 바로 이 표현법 때문에 십자가 처형의 고통이 주님의 첫째 혹은 주된 고민이 아니라고 봐야 한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절규했다. 잠시이긴 하지만 성부 하나님과의 완전한 단절이 너무나 괴로웠을 수 있다. 그러나 곧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것이기에 이 또한 이차적인 의미가 된다.
이 구절을 영어성경이 “sorrowful”이라고 번역했듯이 원어의 뜻은 슬픔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너무 슬퍼서 죽을 지경이었다. 영어 번역 그대로 painful(고통스럽다) 혹은 very anxious(매우 염려된다)는 의미와는 다르다.
제자들더러 머물러 있어 함께 깨어있으라고 했다. 혹시 기도하는데 방해되는 사람이나 동물이 나타나는지 또는 가룟 유다 일행이 잡으러오는지 불침번(不寢番) 서라는 뜻이 아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서 기도하라고 했다.(41절) 내 슬픔의 기도에 너희도 동참해 함께 기도하자, 쉽게 말해 함께 슬퍼하자는 뜻이었다.
부활한다고 큰소리친 예수님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내가 십자가 처형에서 겪을 고통이 너무 극심해서 불안하니까 너희도 기도해서 처형을 면하게 해달라, 어쩔 수 없이 처형당하게 되더라도 성령이 역사하여 그 고통을 못 느끼게 혹은 약하게 겪도록 기도해 달라”고 요청할 리는 없지 않는가?
죄송한 표현이지만 주님은 십자가에 죽고 사흘 만에 다시 사실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여러 번 큰소리치셨다. 그런데 막상 십자가가 닥치자 제자들에게 아주 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다.
또 예수님이 그 동안 사역할 때 보여주었던 모습과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갈릴리 바다에 폭풍우가 몰아치자 어부로 잔뼈가 굵은 제자들조차 죽게 되었다고 두려움에 휩싸였지만 주님은 뱃머리에서 아무 일 없는 양 평안하게 주무셨지 않는가?
누가복음의 본문과 평행기사인 22:41에는 돌을 던질만한 거리만큼 제자들과 떨어져서 기도하셨다고 한다. 약 10-20 미터 정도일 것이다. 평소에는 다른 이의 방해를 받지 않으려고 따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던 주님이 바로 제자들 곁에서 기도하셨다는 뜻이다. 거기다 한 밤중이라 스승이 기도하는 소리를 제자들이 다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 너무 불안하고 걱정됩니다. 십자가 처형이 얼마나 잔인하고 처참하고 고통스러운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제발 십자가만 면하게 해주십시오.”라고 과연 기도했을까? 또 그런 내용을 제자들이 다 들었다면 메시아로서는 물론 스승의 권위가, 말하자면 삼년 동안 쌓은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지 않겠는가?
정말로 십자가 처형만이 걱정되었다면 세 번이나 제자들이 깨어서 기도하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러 오실 마음의 여유는 없다고 봐야 한다. 오해는 마셔야 한다. 예수님이 자발적으로 기꺼이 순종하느라 골고다 언덕에서 당하신 모멸, 조롱, 고통의 크기를 평가절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예수님이 정말로 걱정하고 슬퍼했던 이유와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만 우리도 이 한 주간을 진정으로 경건하고 신령하게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첫째로 그 의미는 아주 간단하다. 주님은 제자들과 육신적으로 이별하는 것이 너무 슬펐던 것이다. 지금 어떤 상황인가? 요한복음에 따르면 방금 전에 제자들에게 고별 설교를 했고 또 그들과 교회를 위해서 기도를 해주었다. 그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면서 너희 중에 한 명이 배반할 것을 예고하셨다. 이름은 밝히지 않았지만 가룟 유다를 향해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했고 유다는 그 말을 듣자마자 식사 중에 제 갈 길을 찾아서 가버렸다.
그 전에도 몇 번이나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예언하셨다. 그럼 제자들로선 오늘 밤이 바로 그날임을 알 수 있고 최소한 어렴풋이 짐작할 수는 있지 않는가? 그럼 함께 이별을 슬퍼하며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 주어야 하지 않는가? 그렇다고 제자들이 부활을 확신하기에 마음을 턱 놓았을 리는 만무하다. 십자가 죽음의 의미도 모르는데 부활은 더더욱 그냥 그런가보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예수님이 세 번이나 다시 와서 확인할 정도로 잠에 골아 떨어진 제자들이다.
말기 암으로 죽게 된 엄마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이 땅에 두고 차마 지금 하늘로 올라갈 수 없었다. 십자가에 오르겠다는 자발적인 헌신과 각오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부활은 하지만 곧 승천해야 한다. 또 부활 후에는 신성과 그 권능이 완전히 회복되어 하나님 본체로 돌아갈 것이다. 제자들과 인간 대 인간으로서 만남은 오늘밤이 마지막이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이렇게나 나태하고 어리석고 당신에 대한 믿음조차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다. 영원한 생명의 본질에 대해선 감도 못 잡고 있다. 제자들을 볼 때 얼마나 근심이 앞서겠는가? 이런 측면에선 우리말 성경이 ‘슬픔’보다 ‘고민’이라고 번역한 것이 더 합당해 보인다.
비유를 하자면 서너 살짜리 아이를 두고 말기 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엄마의 심정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차피 죽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그 동안에 많이 극복했을 것이다. 반면에 어린 자식을 볼 때마다 어떤 심정이 들겠는가?
아이는 엄마가 무슨 병에 걸렸는지 모르고 죽는다는 것조차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앞으로 고아가 되어 혼자 겪을 온갖 고생과 삶의 무게는 짐작도 안될 만큼 크다. 엄마로선 아이를 쳐다볼 때마다 가슴은 찢어지고 눈물이 앞을 가린다.
바로 내일이 의사가 말한 시한부 D- Day라면 그 전날 밤에 아이의 얼굴을 보고 또 보면서 완전히 머리에 각인시키려 들 것이다. 지금 주님은 그런 심정으로 세 번이나 기도 중에 오셔서 제자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살피셨다.
지금 평소에 가장 사랑했던 제자 셋을 데리고 갔지 않는가? 예수님으로선 이 땅에서 진짜로 마지막 드리는 기도다. “하나님 아버지 저들과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으면 안 됩니까? 시험에 들지 않고 깨어 있게 더 가르치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곧바로 수제자 베드로가 당신을 세 번 부인할 것이고, 나머지 모두는 도망갈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다 베드로는 나중에 철저히 회개하고 십자가에 바로 달리는 것도 자기에게 과분하다고 여겨서 거꾸로 매달려 예수님 당신보다 더 심한 고통을 겪을 것도 알고 있었다. 도망갔던 다른 제자들도 모두 십자가에 달려 순교할 것이고, 의심 많던 도마도 전승이 사실이라면 사지(四肢)가 말에 끌려서 산 채로 찢어져 죽을 것이다. 제자들 모두 어떤 핍박을 받을 줄을 알고 있었다. 스승으로 슬픔으로 죽을 지경이 안 될 수 없다. 그래서 뭔가 다른 길은 없는지 성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것이다.
간단히 이렇게 생각해보라. 주님으로서 이 땅에서 마지막 기도인데, 말하자면 어린 자식을 두고 가는 엄마인데 그 마지막 날 밤에 어차피 죽을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하겠는가, 두고 가는 자식을 위해 기도하겠는가?
슬픔과 분노에 가득 찼던 예수
예수님이 이처럼 슬픔으로 가득 찼던 때가 또 있었다. 예루살렘 입성하기 직전, 고난주간이 시작되기 바로 전에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11:35) 영어로는 단어 둘로 된 문장, “Jesus wept.”인데 성경에서 가장 짧은 구절이다. 속으로 흐느끼셨다는 뜻이다. 슬픔이 당신의 가슴에 가득 찼다.
친구 나사로가 죽은 탓만은 아니다. 당신께서 그를 죽음에서 곧 소생시킬 것이다. 꼭 그렇게 슬퍼해야 할 이유로는 부족하다. 주변의 모든 인간들 즉, 누이들과 초상집에 문상 온 유대인들과 당신의 제자들이 진짜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고 영적 생명의 살고 죽음에는 관심조차 없는 것이 너무나 슬펐던 것이다. 이 땅이 전부인양 육신의 호사와 풍요와 안락만을 모든 인생들이 목표로 삼아 허덕거리는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유대인들도 궁극적으로 마지막 날에는 부활이 있으리라는 신앙을 어렴풋이 가지고 있긴 했다. 그때가 이를 동안에는 아무 의식도 없이 ‘스올’(음부)에서 잠자며 대기하는 것으로 여겼다. 바꿔 말해 마지막 날이 언제 이를지 모르니 실질적으로는 나사로의 죽음으로 그 인생은 끝났다고 본 것이다. 예수님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요11:25,26)는 말씀도 제자들에게마저 소귀에 경 읽기였을 뿐이다.
이 때 주님은 슬퍼하시면서 동시에 크게 분노하셨다. 사탄이 최초의 인간더러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로 타락시키는 바람에 그 후손들이 하나님의 참 사랑과 권능을 등지게 된 사실에 말이다.
심지어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유대인들조차 그분께 선택된 민족으로 거룩한 율법을 소지하고 있기에 구원은 확보되었다고 과신하는 대신에 자기들은 구제, 기도, 십일조, 선행에 열심인지라 그에 상응하는 현실적 보상만 바라고 있었다. 또 율법을 잘 아는 유대인들일수록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과 민족 반역자 세리들과 음란한 창녀와 귀신 들린 자 불치병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치부하고 아예 상종도 하지 않았다. 또 그러는 것이 거룩한 백성이 행해야 할 거룩한 일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또 그런 자들이 종교 정치 지도자가 되어서 백성들을 오도했다. 종교 장사로 자기들 배만 채우고 있었고 예수님으로 인해 자기들 수입이 떨어질 것을 염려해 주님을 박해하려 드니 얼마나 화가 치밀었겠는가? 또 그 배후에 있는 사탄의 흑암의 세력에 대해 주님은 극도로 분노하셨다.
바로 그 자리 즉, 부활 소망이 전무한 유대인들과 사탄의 종이 된 줄도 모르고 외식하는 유대인들 앞에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명하여 다시 살려내었다. 부활이 궁극적인 마지막 날의 일이 아니라 하늘에선 이미 확정된 미래로 이제 곧 당신의 부활을 통해 이 땅에서 실현된 과거로 바꿀 것이다. 그 영원한 생명의 생생한 예표로 나사로를 미리 다시 살린 것이다.
표정 관리가 너무 힘드셨던 예수님
예수님의 이 땅에서 마지막 일 주간은 나사로 무덤 앞에서 품었던 인간들에 대한 슬픔과 사탄에 대한 분노의 심정으로 지내셨다. 그러다 십자가를 지셔야 할 전날 밤에 그 감정이 폭발할 지경이 되어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신 것이다.
그 주간의 첫날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에 유대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마 21:9)라고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표정을 관리하기에 너무 힘이 들으셨을 것이다.
이제 나를 메시아로 알아보니 너무 기쁜데 마냥 좋아하자니 경망하게 보일까봐 걱정했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네 복음서를 살펴보면 예루살렘 백성들이 열렬히 환영했다는 기록뿐이고 그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에 대해선 모두 침묵하고 있다.
주님은 이제 곧 사흘만 지나면 저들이 표변하리라는 것을 아셨다. 그들이 열렬히 바랐던 육신의 생명을 풍요롭게 만들어줄 것을 당신께선 하나도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그들은 또 다시 사탄의 농간에 조종당해 당신에게 저주를 퍼부을 것을 다 아셨다.
그렇다고 구태여 그런 근심어린 내색을 하여 지금의 열렬한 환영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지 않는가? 아무리 예수님이라도 내심 참으로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입성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내심에 슬픔이 가득 차서 일주일 내내 그런 심정으로 지내시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까지 이어진 것이다.
고난주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
그럼 신자가 고난주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당하신 고통이 얼마나 크고 참혹했을까 연민의 정으로 보내는 것은 완전히 말도 안 되는 것 아닌가? 지금 천국 보좌에 좌정하신 주님에게 슬픔을 가중시키고 걱정을 더 끼쳐드리는 짓밖에 더 되는가?
주님의 고난보다 그 슬픔에 동참해야 한다. 그것도 주님처럼 죽을 만큼 슬퍼해야 한다. 무엇에 대해서 슬퍼해야 하는가? 예수님의 죽음이 아니다. 인간들의 비참한 영적 상황에 대해서다. 또 이 세대의 영적으로 사악해진 흐름에 대해 죽기까지 저주하며 분노해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고난주간의 의미에 대해서도 지금껏 사실상 제대로 알지 못했던 내 자신의 영적인 무지와 가난하고 초라한 영성에 대해 애통해야 한다. 십자가 구원 진리 외에 인간 구원의 길이 없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알아야 한다. 그 은혜 안에 있는 내 새로운 생명이 얼마나 고귀한지 체험적인 확신을 가져야 한다. 주님의 은혜 안에 붙잡혀 있기에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죄악과 사탄과 사망의 세력 앞에 당당하게 맞서 싸우고 있는지 재점검해봐야 한다.
한번 생각해보라. 우리가 주님에 대해 슬퍼하고 연민을 갖는다는 것, 하나님이신 그분을 인간 주제에 마치 염려해주는 것 같이 여기고 행하는 것이 너무나 말도 안 되는 것 아닌가? 물론 십자가 구원이 너무 귀해서 일 년 중에 일 주일을 따로 떼어 주님의 십자가에 당하신 고통에 대해서 감사 회상하는 것은 순진하고도 선한 의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혼자 남겨진 서너 살짜리 아이가 암으로 돌아가신 엄마가 유서로 남겨둔 편지를 발견하고 읽었다 치자. 신자에겐 그게 바로 성경 그 중에도 사복음서인데 두고 갈 제자들에게 “너희가 곧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함께 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엄마의 유서에도 혼자서 담대하게 살라 하늘에서 내가 너를 지켜보겠다는 유서를 남길 것이다.
그런데도 아이가 계속해서 엄마는 “왜 나를 이 모양으로 혼자 남겨두고 먼저 죽어서 나를 죽도록 고생만 시키는가? 유산을 많이 남겨 두지는 못해도 최소한 먹고 마실 것 걱정하지 않을 정도만 남겼어도 내가 생활고에 부대끼지 않고 공부 열심히 해서 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는데 엄마가 너무 원망스럽고 밉기까지 하다.” 계속해서 불평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을 위해 헌신한다고 흔히 말하지만 말은 쉬워도 그 실천은 저부터도 제대로 못한다. 우리는 그런 실력이 못 된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이 하늘 보좌에서 365일 24시간 7일 내내 우리를 염려하여 보호하고 인도해서 하늘의 모든 귀하고 참된 생명으로 채워주신다. 궁극적으로는 당신의 영광에 동참시키신다.
예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해주셨고 또 끝까지 전혀 변함없이 사랑해주신다. 고난주간에는 그 사랑을 진짜로 실감해야 한다. 겉으로 입술로만 주여, 주여 외치며 심각하고도 경건한 표정만 지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쁘고 즐겁게 보내야 한다. 주님이 우리를 끝까지 사랑해서 당신의 영광으로 인도하고 계시지 않는가?
그것으로 그쳐선 안 된다. 주님은 세 번이나 제자들의 상태를 확인하러 오셨다. 아직도 주님의 사랑을 누리지도, 알지도, 아니 받을 수도 없는 불신자들을 바로 그 주님의 사랑으로 품고서 그들을 향해 진심으로 눈물 흘려야 한다. 불신자를 가장 먼저 도와야 할 측면이 현실적 어려움이 아니다. 그들의 영적 가난 피폐함을 보고 눈물이 나지 않고 최소한 가슴이 메어지지 않는다면 솔직히 신자 자신의 구원을 의심해 보아야 한다.
고난주간에 대해서 처음에 들었던 반장의 비유에 비추어 설명해보자. 주님이 내 대신 죄 값을 감당하고 죽으심으로 얻게 된 구원에 대해 감사하고 최소한 미안해하는 것까지는 아주 좋은 반응이다. 그런데 일반 신자로 남아 있어서 핍박이나 손해를 보지 않아 다행이라고 여기거나 앞으로 죄를 지어도 용서하는 은혜를 더 많이 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너무나 잘못된 것이다. 신자가 절대로 가져선 안 되는 생각이다.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예수 믿는 모든 신자는 불신자들 앞에서 반장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 주님의 사랑만이 모든 인간에게 알파요 오메가임을 알게 해주기 위해서 그들을 대신해서 벌을 받아야 한다. 자신의 외적 현실이 궁핍해질지라도 이웃의 내적 영혼이 충만해지게 하는 일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그 목적을 다시 확립하고 하나씩 실천해 나가야만 신자가 고난주간을 정말로 주님 뜻에 맞게 올바르게 보내는 것이다.
3/25/2018
예수님의 고난 / 요 19:1-16 > 설교자료실
예수님의 고난 / 요 19:1-16박삼우 목사사도행전 강해 ④ 예수님의 고난 (요 19:1-16)우리 기독교와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 중 하나가 고난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설교도 고난 이야기가 제일 많습니다. 어쩌면 예수 믿고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단어 중 하나가 고난일 것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복음이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 복음을 이루는 과정이 전부 고난이었습니다. 고난을 통해 예수님 구원역사를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루어진 복음이 고난을 통해 전파되었습니다. 여러분 사도행전을 읽어보십시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항상 고난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복음은 고난을 통해 전파됩니다. 그런가하면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또한 고난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경건하게 살고자하는 사람은 고난을 받습니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이 모든 고난 중에 가장 중요하고 또 중심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입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은 바로 이 주님의 고난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에서 우리가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먼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라고 한 다음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라고 고백하고, 그리고는 예수님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그러면 이제 오늘은 이 고백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고난을 받았다고 했으니 본디오 빌라도 대해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 당시 유대나라를 다스리던 로마의 총독이었습니다. 당시 로마는 남부 유럽 전부와 아프리카 북부, 그리고 중동 아시아를 다스리고 있었던 세계 최강의 나라였습니다. 당시 유럽의 중, 북부에는 아직 국가라는 것 자체가 없을 때였으니 당시로서는 로마가 아시아를 제외한 전 세계를 다스리고 있었던 셈입니다. 본국은 황제가 다스렸고, 다른 점령지는 총독을 보내어 다스리게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13명의 총독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총독 가운데 수리아 지역을 다스리던 총독이 본디오 빌라도였습니다. 당시 수리아는 지금의 레바논과 시리아 지역을 가리킵니다. 유다는 수리아의 한 부분으로 속해 있었습니다.본디오 빌라도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 초창기에 시골 교회에 영수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교역자가 턱없이 모자라던 때라 교역자가 없는 시골교회에 장로님도 없을 때 집사님 중에 좀 오래 믿은 분을 선택해서 영수라고 해서 교회를 돌보게 했습니다. 영수가 교역자가 없는 교회에서는 설교도 하곤 했습니다. 어느 시골 교회에 나름대로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영수가 있었습니다. 성경을 열심히 연구해서 설교를 하는데 하루는 이 사람이 설교를 하면서 자기가 성경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빌라도의 성이 원래 오씨였다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빌라도의 성이 원래 오씨라니 그러면 빌라도가 한국 사람이었단 말인가?’ 쑥덕거렸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이 영수님이 자신만만하게 설명을 했습니다. ‘빌라도의 성이 원래 오씨인데, 즉 오 빌라도인데, 다른 성으로 바꾸었다. 그래서 사도신경에 본디 오씨라고, 본래 오씨였기 때문에 본디오 빌라도라고 한 것이다. 그러니 빌라도는 성을 바꾼 사람이다.’ 라고 설명했습니다. 성경을 이런 식으로 깊이 연구하면 큰 일 납니다.본디오가 이름이고 빌라도가 성입니다. 그는 주후 26년에서 36년까지 10년 동안 수리아의 총독으로 있었습니다. 그가 거하던 총독부는 원래 가이사랴 빌립보에 있었습니다. 예수님 잡히실 때는 유월절을 전후해서 예루살렘에서 정치적 소요가 있을 것 같다는 정보에 따라 예루살렘에 총독부를 잠시 옮겨 있었는데, 이 때 예수님을 재판하게 된 것입니다.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또 일을 추진한 사람들은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였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붙잡았을 때 처음 끌려 간 곳도 대제사장의 집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식민지 하에 있던 이스라엘에게 최고의 권력을 가진 자치 기구는 산헤드린 공회였습니다. 유대인의 최고회의로서 71명으로 구성되었고 공회 의장은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대제사장의 집에 끌고 갔을 때 자기들 나름대로 공회로 모여서 예수님을 심문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공회는 불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공회도 사형을 판결한 권한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리들은 사형을 결정해놓고 그것을 허락 받기 위해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끌로 간 것이었습니다.이렇게 볼 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이라고 해야 정확할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당시 대제사장 문중의 어른이었던 안나스가 문제 인물이었습니다. 원래 대제사장은 종신제였습니다. 한 번 대제사장이 되면 죽을 때까지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이었는데 로마가 볼 때 유대인의 구심점이 대제사장이었습니다. 로마는 유대를 잘 다스리기 위해 대제사장의 권한을 어느 정도 인정해 주고 그 대신 권력의 집중을 막기 위해 대제사장을 일 년마다 바꾸도록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허락하는 대신에 새로 되는 대제사장을 전임자가 임명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렇게 타협이 되어서 당시에는 일년마다 대제사장이 나오게 되었는데 안나스는 다른 사람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지 않고 자기의 네 아들과 사위를 돌아가면 대제사장에 앉혔습니다. 예수님을 죽일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는 그의 사위였습니다. 이러니 실질적으로 모든 권한은 안나스에게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붙잡은 다음 제일 먼저 끌고 간 것도 그의 집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기로 도모한 모든 일의 장본인이 안나스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도신경에 안나스의 이름은 아예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의 모든 책임이 빌라도에게 떠넘겨져 있습니다. 빌라도로서는 억울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결정한 사람은 빌라도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재판관이었습니다. 최종 결정은 재판관이 내리는 것이요 그 결정에 대한 책임 또한 재판관이 지는 것입니다. 빌라도만 예수님에게 고난을 가한 것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책임자요 대표자입니다.주님 고난에 대한 빌라도의 행적은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하는 것을 복음서를 통해 살펴보면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죄를 찾지를 못했습니다. 죄를 찾지 못했다면 총독으로서 무죄를 선언하고 석방해주어야겠는데 그렇게 하지는 않고 자꾸만 정치적으로 타협점을 찾으려했습니다. 여기에 빌라도의 모순이 있습니다. 그는 진리나 공의 보다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를 원했습니다.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당시 빌라도는 백성들에게 인기가 없었다고 합니다. 망대는 무너지고 이곳 저곳에서 소요가 일어나고 로마 정부에서도 빌라도의 능력을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우선 안전을 도모해야겠다는 생각이 빌라도에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우선은 유대인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민란이라도 일어나면 골치 아파지니 쓸데없이 문제를 확대하지 않겠다는 의도입니다. 그 다음은 예수님이 죄가 없으니 한 번 살려보겠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목적을 두고 그는 예수님에 대한 재판을 진행하고 있습니다.이 목적을 가지고 그가 첫 번째로 생각해 낸 것이 바라바와 예수 중 한 사람을 살려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에게 최고의 명절입니다. 그래서 이 날에 로마 총독부가 유대인들의 요청에 의해 죄수한 사람을 특사로 살려주는 은혜를 베풀어 왔습니다. 이 전례를 이용해서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과 바라바 중 한 사람을 살려주겠다고 했습니다. 바라바는 아주 비열한 폭도요 살인자였던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이 아주 싫어하는 죄수였음에 분명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놓아주도록 요청할 것이고 그러면 예수님을 놓아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 했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빌라도의 기대와는 정 반대로 바라바를 살려달라고 했습니다. 그의 첫 번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빌라도가 유대인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살려주기 위해 두 번째로 한 일은 군병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희롱하며 때리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공관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사형 선고를 받고 난 다음 군병들에게 채찍질 당한 것처럼 나타납니다만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말씀을 보면 예수님 사형 선고를 받기 전에 이미 채찍질 당했습니다. 이 부분은 요한복음이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빌라도의 계산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실컷 때림으로 죽음에서 건져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군병들의 채찍은 지금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채찍이 아니라 끝에는 쇠붙이가 붙어 있는 것으로 때리면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오는 무서운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채찍으로 예수님을 때리고는 또 가시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예수님은 온 몸은 피로 붉게 물들었을 것이고, 가시면류관을 쓰시므로 머리마저도 피에 젖었을 것입니다.이렇게 해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군중들 앞으로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하면서 “보라 이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피투성이 되도록 때리게 해서 처참해진 모습을 보여줌으로 무리들에게서 동정심을 유발시켜서 놓아주려고 의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빌라도의 계획 역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보자말자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결국 빌라도는 자기를 책임이 없다면서 손을 씻고는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선언합니다. 생각해보면 손을 씻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자기가 결정했는데 손을 씻는다고 책임이 없어지겠습니까?그는 예수님의 무죄를 확신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무리들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자꾸만 타협을 하겠다고 나왔습니다. 재판은 타협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 사람의 목숨을 죽이느냐 살리느냐 하는 문제를 타협으로 결정지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타협도 사람 비위 맞추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세상과 하나님 둘 다 비위를 맞추려 했고 결국은 세상의 비위를 맞추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실제 당시 로마의 권한을 생각해 볼 때 빌라도는 마음만 먹었으면 예수님을 얼마든지 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하지 못했기에 그는 책임을 질 수밖에 없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빌라도는 법적으로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 법적인 책임자가 된 것입니다그리고 또 한 가지 사도신경이 예수님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 한 것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역사성을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예수님 인류의 역사 가운데 고난을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동화나 전설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역사 안에서 주후 26년에서 37년 사이에 수리아 총독이었던 빌라도에 의해 고난을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분명하고 확실한 역사적 사건임을 못 박고 있습니다.그러면 여기서 예수님의 고난의 성격을 한 번 살펴보십시다. 예수님 어떤 고난을 받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은 한 평생 고난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사도신경에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신 것만 말씀하셨지만, 생각해보면 그것은 주님 받으신 고난의 대표적인 것을 말씀한 것이고, 사실상 예수님은 한 평생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33년 동안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습니다만, 그 모든 것을 요약하면 고난을 받으신 것이 됩니다. 십자가 사건 전후로만 고난을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물론 십자가의 고난은 주님의 고난의 절정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주님은 전 생애가 고난의 생애였습니다. 탄생부터가 고난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 되신 것이 고난이요 그것도 말구유에 태어나신 것은 고난이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피난가신 것도 고난이었습니다. 자라나는 과정도 고난이었습니다. 가난한 가정에서 목수의 일을 도우며 자라셨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고난의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궁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 하나 없다” 고 하셨습니다.이렇게 고난의 생애를 사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지기 전과 십자가를 중심으로 가장 큰 고난을 당하십니다. 십자가 지기 직전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주님의 고난은 절정에 이릅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에는 본디오 빌라도를 통해 십자가의 고난을 주님의 고난의 대표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고난을 받으셨습니까? 주님이 당하신 고난은 어떤 고난이었습니까? 그것은 아픔의 고난이 있습니다. 채찍에 맞으셨고, 가시 면류관을 쓰셨고, 십자가에 매 달리셨습니다. 여러분 말이 쉬워 십자가지 그 고통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생살에다 못을 박아 사람을 공중에 매달아 놓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고통으로 최고의 고통이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아픔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둘째는 배신의 고난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자신의 제자에 의해 팔림을 당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주님이 체포되는 순간 다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3년 동안 직접 양육한 제자들에 의해 완전히 배반당하신 것입니다.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큰 소리 치던 베드로는 조그마한 계집종 앞에서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맹세하며 저주까지 했습니다. 이 또한 얼마나 참기 어려운 고난이었겠습니까? 배신의 고난이 있었습니다.세 번째는 조롱을 당했습니다. 대제사장의 집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 무리들은 예수님의 뺨을 때렸다. 얼굴에 침까지 뱉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모독입니까? 예수님에 대한 조롱은 빌라도의 관정에서 군병들에 의해 최고조에 이릅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에게 자색 옷을 입혔습니다. 붉은 옷은 왕이 입는 옷의 색깔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왕이라 한다고 해서 놀린다고 붉은 옷을 입힌 것입니다. 그의 손에는 갈대를 쥐어주었습니다. 옛날 임금들은 홀이라는 지팡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갈대를 쥐어주면서 홀이다 하고 놀린 것입니다. 거기에다 가시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은 시간은 새벽부터 아침까지였습니다. 가시 면류관을 씌워놓으니 아침 햇살에 금관처럼 빛났을 것입니다. 당신의 왕관 참 멋지구나 조롱했을 것입니다. 조롱은 십자가 위에서도 계속되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러면 뛰어 내려라.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한다.” 조롱하며 비웃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땅에 오셔서 이런 고난을 당하셨습니다.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사실이 남았습니다. 이렇게 주님 당하신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많이 당했다, 그것이 중요한 것 아닙니다. 그 의미가 무엇이냐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세 가지 의미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첫째는 우리로 풍성한 삶을 누리도록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일찍이 예수님이 고난당하시기 칠백 년 전 이사야 선지자는 사 53:4-6에서 주님의 고난에 대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가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라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임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한 마디로 우리를 대신해서 고난당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렸고 우리의 죄악 때문에 상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 이렇게 고난당하심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주님은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입도록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생각해보면 주님은 죄 없으신 분으로 자원해서 고난을 당했습니다. 이유는 주님이 고난을 당함으로 우리가 풍성한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고전 8:9에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유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유케 하려하심이라.” 주님이 부유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신 것을 우리로 부유케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부유하도록, 우리가 풍성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주님 고난을 당했다는 진리입니다.여러분 어떻습니까? 주님이 그렇게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로 풍성케 하셨는데 과연 우리가 그 풍성함을 얼마나 누리고 있습니까? 우리로 부유하도록 주님이 가난해졌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보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여기 한 아들이 있습니다. 아들은 외국에 나가 고생 고생하면서 돈을 벌어 사랑하는 부모님에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은 아들이 보낸 송금 수표를 돈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휴지통에 버리고 여전히 어렵게 살고 있다고 해보십시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 되겠습니까? 주님 우리로 부유한 삶을 살도록 고난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유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 되겠습니까?여러분, 주님이 주신 은총을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의 고난으로 우리는 죄사함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 되었습니다. 주님 안에 있는 모든 부요가 나를 위한 것입니다. 영원한 나라의 상속자도 되었습니다. 이 은총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누려야 합니다. 여러분 가슴을 펴십시오. 세상 것 조금 없다고 기죽을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제일 부유한 사람들입니다.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의 고난을 헛되게 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진정 풍성한 삶을 사는 것이 주님의 고난을 헛되게 하지 않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둘째, 주님의 고난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일입니다. 내가 받을 고난을 대신 당했습니다. 얼마나 고마운 이야기입니까? 옛날에 우리나라에도 남이 벌을 대신 받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흥부전」에 보면 흥부가 다른 사람이 맞아야 할 곤장을 대신 맞는 대목이 있습니다. 내가 죄를 지어 곤장을 맞아야 하는데 맞으면 아프니, 돈을 주고 다른 사람을 사서 그가 대신 매를 맞게 합니다. 이렇게 할 경우 대신 맞는 사람에게 충분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돈을 내야 합니다. 당연히 매를 많이 맞으면 맞을수록 돈을 많이 주어야 합니다.예수님 우리 대신 당한 고난이 어떤 고난입니까? 가장 큰 고난, 말로는 다 형용할 수 없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나를 대신해서 매를 맞으셨습니다. 우리가 값을 지불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지불할 수 있겠습니까? 생명을 다 드려도 부족한 것 밖에 없습니다. 평생을 울어도 만 분의 일도 값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찬송 부릅니다. “늘 울어도 그 큰 은혜 다 값을 수 없어 나 주님께 몸 바쳐서 주의 일 힘쓰리.” 그렇습니다. 주님 나를 위해 고난 당하셨으니 나는 주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고난 당하셨음을 신앙 고백할 때 바로 이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고난 당하셨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셋째, 예수님의 고난의 세 번째 의미는 승리로 나아간 고난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신앙고백을 보십시오. 고난에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그 다음 부활에서 승천, 재림으로 이어집니다. 고난을 통과함으로 승리고 나아가고 있습니다. 고난으로 끝나는 고난이 아닙니다. 승리가 기다리고 있는, 승리가 약속되어 있는, 그래서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고난이었습니다. 주님은 고난당하실 때 이 승리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었습니다.중요한 것은 주님의 이 고난이 우리에게도 승리의 보장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도 고난이 있습니다. 앞서 주님이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입었다고 했지 않느냐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고난으로 인해 우리는 풍성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고난이 전혀 없을 뜻하는 것 아닙니다. 원칙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에게 죄로 인해 당하는 고난은 없습니다. 주님이 대신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경건하게 살려고 하다가 당하는 고난, 십자가 지고 주님을 따르려 하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 복음을 위해 당하는 고난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있어야 예수를 제대로 믿는 것입니다.바로 이런 고난에 대해 주님의 고난은 승리의 보장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고난당하신 주님이 오셔서 위로하시고 힘주실 뿐 아니라 승리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와 함께 죽으면 주와 함께 살고 주와 함께 고난당하면 주와 함께 승리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복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까? 예수 믿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까? 염려할 것 없습니다. 주님이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는 주님을 믿고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를 보장하고 있습니다.이제 말은 맺습니다. 주님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나를 대신해서 고난당하시고 나로 하여금 풍성을 삶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이 풍성함을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 고난당하신 주님을 생각할 때 감사할 마음이 있습니다. 주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고난 받았습니다. 생각할수록 여기 감격이 있고 감사가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살 마음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고난은 승리의 보장이 됩니다. 우리도 오늘 주님을 위해 살 때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염려할 것 없습니다. 주님이 승리하신 것처럼 우리도 승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은총으로 모든 고난 가운데서 승리하면 살아가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난주간 예수님의 행적 | 마지막 유월절과 십자가 희생
성경의 예언에 따라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전적으로 예언 그 자체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경 속 메시아는 영광의 모습으로 임재하실 것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자신들이 목숨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다.
‘고난주간’은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로부터 십자가에 못 박혀 운명하시기까지의 한 주간을 일컫는다. 고난주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시고, 그날 밤에 잡히시어 이튿날까지 모진 고초를 겪으셨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찔리시고, 상하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곤욕과 심문을 당하시면서도 모든 것을 묵묵히 감내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주간 행적에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죽기까지 희생하신 사랑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고난주간: 일요일]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다3년간의 복음 사역이 마쳐가던 때, 마지막 유월절을 앞두고 예수님께서는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 제자들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예루살렘 인근의 감람산 기슭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 지역에 도착하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 두 사람을 마을로 보내시며 그곳에서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명하셨다(마 21:1~2, 막 11:1~2). 제자들이 나귀를 끌고 와서 자신들의 겉옷을 나귀의 등에 걸치자 예수님께서 그 위에 앉으셨다. 그때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도 겉옷을 길에 펴며 나뭇가지를 베어 길 위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소리 높여 외쳤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백성들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영했고, 이로써 시온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올 것이라는 구약성경의 예언이 성취되었다(슥 9:9). 날이 저물자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데리고 성 밖 베다니로 가셨다.
[고난주간: 월요일]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다다음 날 아침, 예수님 일행이 베다니를 떠나 다시 예루살렘성으로 들어가는 길에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시장하신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보셨으나 무화과가 열릴 때가 아니라 나무에 열매가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향해 다시는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성전으로 들어가셨을 때 그곳은 장사하는 사람들로 소란스러웠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돈벌이를 위한 상행위가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시고 분노하셨다. 이어 “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책망하시며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셨다. 저녁에는 다시 성을 나와 베다니로 가셨다.
[고난주간: 화~수요일] 예언과 비유로 가르침을 이어가시다1. 종교 지도자들과의 논쟁
다음 날 이른 아침에 다시 성으로 들어가실 때 제자들은 전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무화과나무가 뿌리부터 말라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워했다. 이는 무화과나무로 비유된 이스라엘이 저주 받아 멸망할 것을 실물 교훈으로 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자 당대 종교 지도자들은 여러 논쟁으로 시험을 걸어왔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 일인지에 대해 물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답변으로 그들의 말문을 막으셨다. 또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두개인들이 부활에 대해 논쟁을 걸어오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가르침으로 군중들을 감탄케 하셨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지혜로운 답변으로 훼방을 물리치셨다. 또한 겉으로는 의롭게 보이지만 내면은 불법으로 가득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시며 그들이 결코 지옥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경고하셨다.
2. 말세와 재림에 대한 예언
성전에서 나가실 때, 한 제자가 성전 건물을 가리키며 웅장한 모습에 감탄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감람산으로 가셔서 성전을 마주 보고 앉으시자 제자들은 어느 때에 그런 일이 있을지, 세상 끝과 재림 시에 어떠한 징조가 있을지 조심스럽게 여쭈었다.
예수님께서는 전쟁과 기근과 지진이 재난의 시작이 될 것이며,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많이 나타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고 불법이 성행하여 사랑이 식을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재림의 징조에 대해서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말씀하시며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충성된 종과 악한 종의 비유, 열 처녀의 비유, 달란트의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 등을 통해 마지막 시대 하나님의 백성이 가져야 할 믿음에 대해서 알려주셨다. 이 말씀들을 하신 날은 유월절 이틀 전이었다.
예수님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대제사장 가야바의 공관에 모여 예수님을 죽일 방도를 찾기 위해 논의했다. 그때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가 몰래 그들을 찾아왔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 값비싼 향유 한 옥합을 부어 공경의 예를 다한 여자에게도 그 비용을 아까워하며 불같이 화를 낼 만큼 재물을 탐하던 자였다. 그는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님을 넘겨주면 돈을 얼마나 줄 것인지 물었다. 대제사장들이 기뻐하며 은화 30개를 주자 유다는 그때부터 예수님을 넘길 기회를 엿보았다.
[고난주간: 목요일]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시고 무리에게 잡혀가시다1. 제자들과 지킨 유월절
이윽고 유월절 날이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내 때가 가까웠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겠다”고 말씀하시며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 유월절을 예비하라고 명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유월절을 예비했다(마 26:17~19, 막 14:12~16, 눅 22:7~13).
저녁이 되어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비된 큰 다락방에 모였다. 유월절 만찬을 앞두고, 예수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대야의 물로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겨주셨다(요 13:1~5). 발을 씻기는 것은 종이 주인에게 하는 일이기에 베드로는 당혹스러워 이를 사양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에 놀란 베드로가 그렇다면 손과 머리도 씻겨달라고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미 목욕한 자, 곧 침례 받은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의 발을 모두 씻기신 후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유월절 떡과 포도주를 당신의 살과 피라고 말씀하시며 먹고 마시라고 하셨다.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게 하여 죄 사함과 영생을 얻게 하신 것이다. 또한 유월절은 당신의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이를 행하여 당신을 기념하라고 당부하셨다. 구약시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유월절에 해방시키셨듯, 신약시대 예수님께서도 죄와 사망의 종이었던 당신의 백성들을 새 언약의 유월절을 통해 해방시키셨다(요 8:32~34, 계 1:5). 그리고 유월절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셨다(요 13:34). 이날 밤 예수님께서는 제자 중 하나가 당신을 팔 것이며 제자들이 모두 당신을 떠나가 버릴 것을 예언하셨다. 그 말씀에 베드로는 모두 예수님을 버릴지라도 자신만큼은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일 밤 닭이 울기 전에 베드로가 당신을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는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2. 겟세마네에서 기도 후 체포
유월절을 지키고 밤중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언덕에 오르셨다. 제자들 중에 베드로, 요한, 야고보만 당신을 따르게 하시고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신 다음, 조금 더 떨어진 곳으로 가셔서 임박한 고난을 생각하며 간절히 기도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세 번 하시고 나서 제자들에게 오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엄청난 고난을 앞두고 계셨지만 이를 알지 못한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잠에 취해 있는 제자들을 깨우며 당신을 파는 자가 가까이 왔음을 알리셨다.
그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보낸 많은 무리가 칼과 몽둥이를 들고 왔다. 미리 짜둔 신호에 따라 가룟 유다가 예수님께 입을 맞추자 무리가 달려들어 예수님을 붙잡았다. 곁에 섰던 베드로가 이 모습을 보고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니,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이 성경의 예언대로 되는 것임을 알리시며 베드로를 제지하시고 종의 귀를 만져 낫게 하셨다.
무리가 예수님을 잡아 결박하는 사이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다. 예수님은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끌려가셨다. 그곳에는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거짓 증거를 찾으려 했으나 아무리 고심해도 증거를 얻지 못했다. 그때 가야바가 예수님께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렇다고 답하셨다. 이를 들은 가야바는 자기 옷을 찢으며 “저가 참람한 말로 하나님을 모독하니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하겠는가!” 하고 외쳤다. 흥분한 무리들은 예수님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소리치며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며 뺨을 때렸다.
예수님을 멀찍이서 따라온 베드로는 바깥뜰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한 여종이 그에게 다가와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이 아니냐고 물었다. 당황한 베드로가 부인하며 황급히 정문으로 나가는데 이번에는 다른 여종이 베드로를 가리키며 그가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베드로는 맹세까지 하면서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잡아뗐다. 잠시 후 곁에 섰던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씨로 보아 그가 예수와 한패가 틀림없다고 말했다. 베드로는 만일 자기가 그런 사람이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며 정말 모르는 사람이라고 강력하게 부인했다. 그때 새벽닭이 울었다. 몸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예수님과 눈이 마주치자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한없이 울었다(마 26:69~75, 눅 22:54~62).
[고난주간: 금요일]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다1. 거듭된 심문과 고난
유월절 다음 날인 무교절 새벽,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합의하고 예수님을 총독 빌라도에게로 끌고 갔다(마 27:1). 그 모습을 본 가룟 유다는 잘못을 뉘우치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대가로 받았던 은화 30개를 대제사장에게 되돌려주려 했다. 그러나 그들이 거절하자 성전에 은화를 내던지고 나가서 목을 매어 삶을 마감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빌라도 앞으로 끌고 가서 ‘이 사람은 백성을 미혹하고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못하게 하며 자신을 왕이라 하는 자’라고 고발했다.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유대인의 왕이 맞냐고 물으니 예수님께서는 그렇다고 답하셨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많은 것으로 고발했지만 예수님께서 한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시자 빌라도가 이를 기이하게 여겼다.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죄를 찾지 못한 빌라도는 예루살렘에 와 있던 갈릴리 지역의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에게 예수님을 보냈다. 헤롯이 예수님을 심문했지만 예수님께서 대답하지 않으시자 예수님을 조롱한 후 다시 빌라도에게 보냈다.
예수님에게서 극형을 선고할 만한 근거를 찾을 수 없었던 빌라도는 유월절에 죄수 한 명을 석방해 주는 관례를 생각하고는 군중에게 살인자 바라바와 예수님 중 누구를 석방해 주길 원하는지 물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고 군중을 선동하자 군중은 예수님을 가리키며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다. 빌라도가 이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다시 물었지만 군중은 더욱 소리를 지르며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재촉했다.
흥분한 유대인들을 보며 민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느낀 빌라도는 물을 떠다가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관해 자신은 아무 책임이 없으니 당신들이 책임을 지라고 말했다. 군중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돌리라” 하고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결국 빌라도는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님은 채찍질한 후 십자가에 매달라고 명했다. 이에 군병들이 예수님을 끌고 가 채찍질하고 예수님의 머리 위에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우고 침을 뱉고 갈대로 머리를 치며 온갖 모욕적인 말로 조롱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 십자가를 지우고 골고다로 끌고 갔다.
2. 십자가에서 운명
오전 9시경, 군병들은 예수님의 손과 발에 못을 박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았다. 머리 위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적힌 죄패를 붙였다. 사람들은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받는 예수님을 보며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내려와 보라”고 조롱했고 관원들도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하며 비웃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고 못에 찔려 피 흘리시는 것을 죄인으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로 여겼지만, 구약성경에는 그 모든 고난이 인생들의 죄악과 허물 때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사 53:3~8). 예수님께서는 인생들이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대신 받으시며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좌우에는 강도 둘이 십자가에 달렸는데, 그중 한 강도가 예수님을 비방하며 “네가 그리스도면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했다. 그때 우편 강도가 그 강도를 꾸짖으며 “우리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지만 이분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말하고는 예수님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고 청했다. 고통 중에 우편 강도의 청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며 그에게 구원을 약속하셨다.
정오쯤,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십자가에 달리신 채 6시간 동안 고통을 견디시던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는 마지막 말씀을 마치시고는 숨을 거두셨다. 그 순간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 이날은 출애굽 당시의 고난을 대대로 기념하던 무교절인 동시에 안식일 예비일, 즉 금요일이었다.
날이 저물자 예수님을 따르던 요셉이라는 부자가 빌라도에게 청하여 예수님의 시신을 받아왔다. 그는 깨끗한 세마포로 예수님을 싸서 바위 속에 판 새 무덤에 모시고 큰 돌을 굴려 무덤을 막았다(마 27:57~60). 예수님께서는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자의 묘실에 안치되심으로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다”는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셨다(사 53:9).
예수님의 고난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고난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욥 5:7). 예수님도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하셨는데 그것은 보통 사람이 모방할 수 없는 고난이었습니다. 그럼 예수님은 어떤 고난을 당하셨으며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먼저 예수님의 인간적인 고난이 있습니다. 사실 성육신 자체가 고난입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사람이기를 포기하고 돼지나 개미가 되어보라고 한다면 원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은 동물의 구유에서 아가의 몸으로 탄생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가난의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아버지 요셉이 일찍 죽고 나서 남동생 4명, 여동생 2명, 어머니 마리아 등 많은 부양 가족들을 책임져야 하는 목수 집안의 가장으로 경제적인 압력을 받으셨습니다(막 6:3).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둥지가 있건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집 한 채도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셨습니다(눅 9:58).
예수님은 또 멸시 천대 핍박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가족과 친척들로부터, 또 고향 사람들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를 당하셨습니다(막 3:21; 눅 4:16~). 유대의 권력자들로부터도 많은 핍박과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배신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며 영적, 육체적 양식을 먹던 군중들이 나중에는 배신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하였습니다. 제자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체포가 되었고 대부분의 제자들이 그를 버리고 도망하였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는 3번이나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하기도 하였습니다. 제일 큰 정신적 고통 가운데에 1위가 바로 가까운 사람, 사랑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는 고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인간적인 배신의 고통을 철저하게 느끼고 당하신 분이십니다.
다음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가장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형벌은 심한 채찍으로부터 시작이 되는데 금속/유리 조각을 끼워넣은 채찍으로 예수님의 살점이 터지고 온 몸에 피가 흘렀습니다. 가시로 만든 면류관으로 머리에서도 피가 흘러나왔습니다. 십자가의 무게는 보통 135kg인데 너무 무거워서 죄수는 횡목만(45kg) 지고 가게 하였습니다. 골고다(갈보리) 언덕에서 약 15cm의 철못으로 예수님 손목과 발목에 대못을 박았고 주님은 피흘림과 산소 결핍으로 머리와 온 몸에 극심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주님은 오전 9시에 처형되어 오후 3시까지 6시간 만에 빨리 운명하셨는데 이것은 너무나 극심한 고통을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또 십자가 위에서 속옷 제비뽑기로 발가벗기우게 되는 정신적 수치도 당하셨습니다(요 19:24). 또 구약 율법에 나무 아래 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라는 말처럼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영적인 저주도 담당하셨습니다(신 21:22-23; 마 27:46). 아무 죄도 없으신 주님께서 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셔서 이런 모든 고난을 겪으셔야 한 것일까요? 그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먼저 인간의 죄사함과 구속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히 2:17). 예수님은 나를 대신하여(나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네덜란드의 유명한 화가 렘브란트는 성화(聖畵)를 많이 그렸습니다. 그 가운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 있습니다. 이 그림을 보면 예수님께서 고통을 당하시면서 처형당하는 모습이 아주 생생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거기에는 마리아와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에 서서 울고 있거나 탄식하거나 두려워하는 표정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가운데 그림 한쪽 구석을 보면 렘브란트의 얼굴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습을 그곳에 그려 넣었습니다. 이 그림에 대하여 렘브란트는 그 현장에 자신이 있었다고 말하면서 예수님께서 바로 나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또 복종과 겸손의 본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비록 하나님 아들이시지만 고난으로 인하여 순종을 배우셨다고 합니다(히 5:8). 자아가 강하고 자기 중심으로 사는 자는 고난을 통해서만 깨어지고 겸손하게 됩니다. 위대한 바울도 육체의 가시의 고통이 있었는데 그것은 영적으로 교만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었습니다(고후 12:7). 마지막으로 우리의 위로와 도움을 위해서입니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8). 예수님은 자신이 고난을 겪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고난과 고통과 연약함을 충분히 이해하시고 체휼하실 수 있습니다(히 4:15). 그러므로 우리는 힘들고 괴로울 때마다 영적인 큰 형님이신(히 2:11) 예수님께 나아가 위로와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때를 따라 돕는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아야만 모든 고통이 사라집니다(찬 138장 후렴). 천국 문은 입구가 열두 진주 문으로 되어있는데 이것은 고난을 통과하는 자만이 하늘의 영광을 얻게 됨을 시사해줍니다(롬 8:17). 예수님의 고난에 대하여 묵상하여 항상 감사하면서 여러분이 당하는 모든 고난도 믿음과 기도로 승리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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