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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 성서학당 고린도전서 27강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송태근 목사)
본문 말씀 : 고린도전서 14:34~40
1. 고린도 교회의 시대적 상황
2. 하나님이 주신 여자
3.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라고 말한 바울의 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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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교회에서 침묵해야만 하나요? – GotQuestions.org
고린도전서 14:33-35은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
Source: www.gotquestions.org
Date Published: 12/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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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에 대해 – 코람데오닷컴
목차1. 여성안수금지, 이젠 바뀌어야 한다. 2. 성경해석에서 기억해야 할 세 가지 사실 ▷3.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에 대해▷4.
Source: www.kscoramdeo.com
Date Published: 10/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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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여자들”아, 교회에서 잠잠하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여자는 “교회와 목사 곧 성경를 가르치는 지도자”를 뜻한다. 증명한다. 에베소서 5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남편에 비유하시고 …
Source: gr-church.org
Date Published: 1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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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4:34 KRV – Bible.com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1/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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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14-2: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성경은 남녀차별?
[고린도전서14:20-40]지남쌤의 쉬운설명을 들으면 어려운 성경도 읽어집니다!하루 한장 성경으로 기적을 경험 해 보세요!*영상은 아가서7장부터 성경 …Source: www.youtube.com
Date Published: 8/6/2021
View: 5588
‘여자는 교회서 잠잠하라’는 문맥 맞아 – 뉴스앤조이
무슨 뜻입니까? 성도와 성도 간에도 서로 복종을 해서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면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따라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서 가정과 교회의 질서를 …
Source: www.newsnjoy.or.kr
Date Published: 9/24/2021
View: 3498
여자는 정말 교회에서 잠잠해야 하나요? – 크리스천투데이
한 컨퍼런스에서 목회자들이 손을 들어 기도하고 있다. cKPMA 제공. Q.) 고린도전서 14장 34~5절을 보면 여자는 교회 안에서 잠잠하라 했는데 어떻게 …
Source: www.christiantoday.co.kr
Date Published: 9/26/2022
View: 9771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후대에 편집됐다 – NEWS M
[미주뉴스앤조이=양재영 기자]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기록된 고린도전서 14장의 구절은 사도바울에 의해 쓰여진 것이 아닌 후대에 편집된 …Source: www.newsm.com
Date Published: 7/30/2022
View: 2801
[말씀적용]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Q.목사님 안녕하세요. 고린도전서 14장 34절과 35절을 보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되어있는데,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는지요? 고린도전서 11장 내용도 있고, …
Source: www.galmoi.com
Date Published: 7/4/2022
View: 8298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강재원 목사 (2021년 3월 14일). 성경적인 보수 신앙을 추구하는 크리스천 중에 교회 안의 여성 리더십을 부정하는 분들 …
Source: onnurichurch.org
Date Published: 10/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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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여자 는 교회 에서 잠잠 하라
- Author: CBS성서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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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4. 9. 4.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4j37kYNaVB0
여자는 교회에서 침묵해야만 하나요?
질문
여자는 교회에서 침묵해야만 하나요?
답변
고린도전서 14:33-35은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가정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얼핏 보면 이 말씀은 여자가 교회에서 전혀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맹목적인 명령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같은 서신의 앞 부분에서 (고린도전서 11:5), 바울은 성도들의 집회에서 여자가 기도와 예언을 하는 상황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4:33-35을 여자는 예배 시간에 항상 침묵을 지켜야 한다는 절대적인 명령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금지 사항은 어떤 식으로든 문맥에 따라 해석해야 합니다.고린도전서 14장은 성도의 질서 있는 집회와 관련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혼돈과 무질서가 만연한 집회로 인해 주의를 들었습니다 (33절).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원할 때마다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만큼 큰 소리를 내며 교회 예배에 참여했습니다. 방언의 은사를 가진 자들은 동시에 같이 방언을 했으며, 아무도 방언의 내용을 통역하는데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은 자들은 자신들의 목소리가 소음에 묻혀 들리지 않고, 분명 아무도 그들의 예언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도 무작위로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모임은 그야말로 혼돈 자체였으며, 아무에게도 덕이 되거나 깨달음을 주지 못했습니다 (5, 12, 19절 참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울은 여러 사람들/모임들에게 특정한 때에 특정한 조건에 따라 “잠잠하라”고 명령했습니다.• 27-28절,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29-31절,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34-35절,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가정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이미 살펴본 대로, 고린도전서 11:5에서는 여자가 교회에서 기도와 예언하는 것을 허락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4:34-35은 모든 여자가 항상 어떠한 형식으로든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절대적인 규정이 될 수 없습니다. 방언을 하는 자와 선지자들을 향한 명령에서도 볼 수 있듯이, 어떤 특정한 사람들 역시 특정한 때에 특정한 이유로 말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문맥을 보면 상황에 대한 얼마간의 단서를 알 수 있습니다.첫째, 여성에게 침묵하라고 하는 명령은 두 가지 중요한 문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입니다. 즉 교회 안의 적절한 질서, 그리고 권위에 대한 마땅한 태도와 인식입니다. 보아하니, 일부 여자들은 자기 남편이나 교회 지도자들의 영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로 말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문제는 고린도전서 11장에도 제시되어 있습니다. 여자들은 머리를 가리고 영적 권위에 대한 마땅한 존중 태도를 보여주는 한에서, 기도하고 예언할 수 있었습니다. (1세기에 머리를 가리는 행동은 정숙하고, 존경받는 여성이라는 표시였으므로, 여성은 교회에서 머리 덮개를 벗으면 안 되었습니다. 당시의 문화에서 머리를 드러낸다는 것은 곧 거만하고 부도덕한 행동으로 여겨졌습니다. 오늘날 머리를 가리는 것이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복음주의 해석자들은 단지 머리를 가리는 행동이 아닌, 문화적으로 의미 있는 상징에 따라 표현될 수 있는 존중의 태도가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바울이 말한 것을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만일 여자가 교회 내에서 기도나 예언을 하기 원한다면, 오직 교회 권위에 대한 적절한 존중의 태도를 보일 때에만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고, 그렇지 않으면 잠잠하게 하라.”고린도전서 14:34에 나온 헬라어 구나이케스는 문맥에 따라 “여자” 혹은 “아내” 둘 다 의미할 수 있습니다. 35절에 남편이 언급된 것을 보면, “아내”의 의미가 적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결혼한 여자만이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명령을 결혼한 여자에게만 적용시킨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결혼은 보통 지위 상승으로 여겨졌습니다. 만일 결혼한 여자들이 침묵을 지켜야 했다면, 미혼 여성들은 얼마나 더 잠잠히 앉아 있어야 했을까요?고린도전서 14:34-35에 관한 해석들은 너무도 다양해서 여기에서 다 다룰 수가 없습니다. 주위 문맥을 감안하여 고린도전서 11장과 15장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설명입니다. 직접적인 문맥은 예언의 전달 및 예언에 관한 신중함과 관련이 있습니다. 누군가 공공 집회에서 교회에 예언을 제시하면, 교회는 그것을 판단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4:29). 다시 말해, 교회는 그 예언이 진실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만약 그렇다면 어떠한 행동이 취해져야 하는지 따져보고 평가해야 합니다. 문맥상 가장 적합한 해석은 이 신중한 숙고의 과정에서 여자들이 잠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언의 평가는 영적 권위의 행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좀 더 복잡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아내가 남편의 예언에 의문을 가지거나, 혹은 예언에 대한 남편의 평가를 부정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러한 경우, 아내는 공적 집회에서는 조용히 있다가 집에 가서 사적으로 남편에게 물어보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35절). 이러한 행동으로 남편의 영적 권위를 존중하고 있음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며, 교회 내에서 무질서가 일어날 가능성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이 본문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남편은 자기 아내의 예언이 철저한 평가를 받고 있을 경우, “스스로 피신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일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4:33-35에서 바울의 본래 의도는 예언을 평가하는 숙고의 과정에 여자가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 이 명령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가 문제로 남습니다.고린도전서 11장과 14장 모두에서 바울은 보편적인 원칙으로서 남성이 가정과 교회에서 영적 지도력을 유지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또한 디모데전서 2:12참조). 목사와 장로들은 남성이며, 여성은 교회의 나머지 구성원들과 함께 그 권위 아래에 있습니다. 이 권위에 어떻게 복종해야 하는지는 현재의 문화적 관행에 따라 다르게 인정되고, 적용될 것입니다. 만약 머리를 가리는 것 (11장과 같이)이 문화적으로 여성의 정숙함과 복종을 나타내는 적절한 상징이라면, 머리 덮개를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 상징이 현재 문화와 동떨어진 것이라면, 폐기하고 문화적으로 관련된 다른 상징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현대 서구 문화에서, 수수한 옷차림은 확실히 이와 관련한 상징이 될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것 같은 상징들은, 한때 미국 문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녔을지도 몰라도, 지금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여자가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는 명령에는 문화에 근거한 또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1세기의 여자들이 어떤 집회의 심의 과정에 관여하는 것은 권위의 강탈로 여겨졌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여성의 참여가 권면되는 오늘날의 문화 속에서, 여성들이 자기 남편이나 교회 지도자들에게 적절한 존중 태도를 보이기 위해서 침묵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 제시된 해석은, 가정과 교회에서 남성의 지도력이 존중되고, 여성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며 문화적으로 적절한 방식으로 표현할 때 그 말씀의 정신이 성취되는 것이라는 주장을 견지합니다.
[기고]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에 대해
◇목차 1. 여성안수금지, 이젠 바뀌어야 한다. 2. 성경해석에서 기억해야 할 세 가지 사실 ▶3.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에 대해 ▶4. 초기 기독교 시대 여성 참여. 5. 여성을 향한 예수의 말씀과 행동. 6. 오늘 교회는 여성에 대한 성경을 ‘새롭게’ 읽어야 한다. 7. 여성안수는 성령의 역사를 따르는 우리 시대의 순종이다.
한성국 목사/ 고신대학 신학과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평화교회(부산동부노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3.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전14:33b-40)
3.1. 첫째, 대립하는 말씀에서 보자.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이 말씀은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딤전2:11-15)는 말씀과 함께 여성안수금지를 주장하는 이들이 붙드는 핵심구절이다. 이 말씀은 과연 무슨 뜻일까? 바울은 분명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으며”,(고전14:34)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하라”(딤전2:12)고 말한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바울은 여자가 교회에서 기도(예언)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으며, 단지 ‘머리에 무엇(수건)을 쓰고’ 하라고 권면한다.(고전11:5) 또 바울은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14:35)고 말하지만, (늙은) 여자에게는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라”(디도2:3-4)고 말한다. 여기서 가르침은 교회에서 공적 활동을 말한다.
이런 대립(모순)은 다음에서도 이어진다. 바울은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다”(딤전2:13-14)는 창조와 범죄의 순서를 들어 여성의 종속성을 말한다. 하지만 바울의 신학에서 과연 창조와 범죄의 ‘순서’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일 수 있을까? 오히려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다”(고전11:12)는 말을 보면 창조순서는 큰 의미가 없다. 범죄의 순서도 보자. 바울은 구원의 원리를 설명하기에 앞서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힘주어 말하며 “인간은 모두 죄 아래 있기에 의인은 없으며 하나도 없다”는 범죄의 보편성을 길게 설명한다(롬1:18-3:20). 이렇게 볼 때 범죄의 순서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처럼 창조(또는 범죄)의 순서는 결코 불변적이거나 절대적인 의미를 지닐 수 없다.
바울은 “율법에 따르면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하는 것”(고전14:34)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하나님이 범죄한 여자에게 하신 말씀, “너(여자)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창3:16)이라는 말씀에서 온 것인데, 이 말씀 또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갈3:28)라는 사실과 대립한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속량의 은총을 통해 이제 어떤 차별도 없음을 밝힌다. 나아가 바울은 ‘(율법으로 인해) 죄가 더해지지만 그리스도의 은혜는 그 범죄를 뒤덮고 남아서 넘친다’(롬5:20)고 선언한다. 그리스도 복음의 능력, 곧 구속의 현실은 창조의 옛 질서를 넘어서고 타락의 질서를 깨뜨려버린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 복음의 보편성과 충만함을 강조하는 바울에게 여성과 남성의 창조순서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방인과 유대인의 차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에게 누가 먼저 타락했는가가 왜 중요한가? 복음 안에 새로운 피조물인 그리스도인은 이제부터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한다.(고후5:16,17) 그리스도인의 생각과 교회의 최종 질서를 결정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다. 여성의 위치는 율법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바울의 신학이다.
3.2. 둘째, 성경의 맥락에서 보자,
고린도전서 11장에서는 교회 안에 ‘예언과 기도’로 혼란이 일어났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기도는 공적 기도이며 예언은 오늘로 말하면 말씀을 풀어내는 설교와 같다. 성령의 역사로 이런 은사가 성도들에게 임했는데, 일부 여성들이 예배 중에 수건을 벗고 예언과 기도를 했다. 당시 결혼한 여성들은 머리에 (정절과 순결의 상징인) 수건을 써야 했다. 여자는 배우자(남편)의 영예인데, 여자가 머리에 쓴 수건을 벗는 것은 남편을 부끄럽게 하고 남편의 공적 이미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지금 이런 여성들 때문에 교회 안에 문제가 생겼고 이로 인해 사회로부터 나쁜 평을 듣게 되었다. 바울은 이 일에 반대하여 여자는 관습을 따라 기도와 예언할 때 반드시 머리에 수건을 쓰라고 말한다.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고전11:13)
고린도전서 14장의 문맥도 보라.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힘입어 방언과 예언을 했는데 지금 이 방언과 예언으로 교회예배가 혼란스러워졌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14:33)이시기에 방언은 통역자가 있을 때만, 예언은 질서 있게 행해야 한다. 특히 지금 여성들이 ‘예언’에 대해 교회 안의 남성들과 토론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공공장소에서 여성이 남성과 토론하는 것은 여러 가지 오해의 소지가 있었으니, 때로 성적 유혹으로 여기기도 했다. 그래서 바울은 (결혼한) 여성이 공적 모임(교회)에서 다른 남성들과 토론하는 것을 금하면서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14:35)”이라고 말한다. 만약 이 문제를 방치할 경우 교회는 부도덕한 집단으로 비칠 위험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14:34)는 이 구절은 여자들로 교회에서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침묵하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했는데 어찌 침묵을 강요할 수 있겠는가! 단지 ‘질서를 지키면서 예언(방언)을 하라’는 말이다. 곧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질서를 지켜야하듯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sigao).”(14:33b-34a) ‘만일 (방언하다가)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sigao,28)’, ‘만일 (예언하다가)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잠잠해야 하듯이(sigao,30)’, 여자들도 질서를 지켜 잠잠해야 한다. 여기서 바울은 여성이 교회에서 예언(기도, 방언)하거나 배우고 가르치는 것을 금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14:39-40)가 그의 뜻이다.
바울의 생각은 이러하다 : 여성들이여.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아무렇게나 말하거나 행동하지 말라. 여러분이 문제의 장본인이기에 교회의 질서를 위해 예언(기도, 방언)을 금할 수밖에 없다. 나는 ‘현재로서는’ 여성이 가르치거나 남자를 다스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3.3. 셋째, 복음 선포의 관점에서 보자.
왜 바울은 지금 여성에게 “교회에서 잠잠하라, 가르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 남자를 주관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하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지금 여성들의 행동이 복음전파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여성들의 과도한 발언과 주장이 교회를 어지럽혀 하나님의 복음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가 방언보다 예언을 높이 평가한 이유도 보라.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고전14:23) 이처럼 그가 예언을 방언보다 높이 평가한 것은 교리적 판단이라기보다 복음전파의 유익 때문이었다.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고전11장)도 보자. 당시 가부장적 사회에서 이것은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된다는 표지였다. 그것은 그 사회를 지탱하는 질서였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이 주는 자유와 평등을 깨달은 일부 여성들은 그 틀을 벗어나려 했다. 수건을 벗는 것이 대표적인 일이었다. 이 행동은 여전히 그 질서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낯선 풍경이었고, 사람들로 교회공동체에 들어오는 것을 가로막는 하나의 장애물이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다”(고후3:17)고 선언한 바울이 복음의 자유와 평등을 거부했을 리 없다. 단지 바울은 지금 여성들의 과도한 행동 때문에 복음전파의 길이 막히는 것을 염려한다.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딤전2:11-15)는 말씀도 보자. 지금 일부 여자들이 거짓 교사들의 부추김을 받아 가정생활과 사회풍속에 어긋나는 행동으로 문제를 일으켰다. 에베소교회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거짓 교사들은(딤전1:3) 다른 교훈을 가르치고 신화와 끝없는 족보 이야기와 터무니없는 변론을 일삼았다.(1:3,4)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을 먹지 말라고 가르쳤으며(딤전4:3)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딤후2:18)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을 부인하는(딤후3:5) 이들은 심지어 경건을 이익의 수단으로 이용하기까지 했다.(딤전6:5) 특히 어리석은 부인들을 유혹하여 그릇된 가르침을 전파했으니,(딤후3:6-7) ‘땋은 머리와 금과 진주나 값진 옷‘을 장식한 부유층 여성들이 그 대상이었다.(딤전2:9) 이 여성들은 지식에 대한 욕구가 강해서 늘 공부하지만 끝내 참된 지식에는 도달하지 못했으며,(딤후3:7) 건전한 교훈을 받기보다는 자신의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들으려고 자기네 욕심에 맞는 선생을 따랐다.(딤후4:3) 이 여성들은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고(딤전5:8) 집집으로 돌아다니면서 쓸데없는 말로(5:13) 공동체의 평화를 깨뜨렸다.(6:4) 그런데 지금 이 여성들이 공동체 안에서 지도력을 발휘하여 남자들을 가르치고 다스리려 했던 것이다.(2:12)
이것은 막 싹이 돋아나는 초기기독교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바울은 교회를 지켜야 했다. 그는 이 작은 공동체가 시대와 마찰을 일으켜 공공질서와 풍습을 훼손하는 비밀스런 종파 중의 하나라고 오해받을까 염려했다. 그는 복음의 길이 이 일로 가로막히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3.4. 언제나 복음전파와 교회의 유익이 중심이다.
바울을 비롯한 성경의 저자들이 취한 교훈(행동)의 기준은 그것이 복음전파에 얼마나 유익한가였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을 자격이 있으나 교회의 유익을 위해 포기했으며(고전9장),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진 고기를 능히 먹을 수 있으나 형제를 실족할 가능성이 있다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전8:13)고 다짐한다. 고전7장을 보자. 여기서 바울은 믿지 않는 부부에게는 이혼하지 말 것을, 혼인하지 않는 남녀에게는 독신을, 약혼녀와 과부에 대해서는 그냥 지낼 것을 권한다. 이것은 교리가 아니라 오직 “아내(남편) 된 자여 네가 남편(아내)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고전7:16)라는 복음전파의 가능성 때문이다. 바울은 말한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다.”(빌1:20) 베드로의 권면도 같은 이유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다.”(벧전3:1) 이것이 성경의 한결같은 관점이다.
여성에 대한 바울의 기록에서 대립하는 말씀들을 찾고, 그 말씀이 주어진 각각의 맥락을 정확히 이해하자. 그리고 대립하는 말씀들은 다양한 상황에서 펼쳐진 복음실천이었음을 기억하자.
4. 초기 기독교시대 여성참여.
4.1. 로마서 16장을 보자.
바울은 이 서신의 전달자로 여성사역자 뵈뵈를 파송한다(추천한다). 그는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diakonos)이고 바울의 ‘보호자’(prostatis)였다. 사도행전 7장을 볼 때, 집사(diakonos)는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사역도 했다. 특히 “고대사회에서 편지의 전달자는 수신자들에게 발신자를 대신하여 편지의 내용까지 설명하는 책임을 지녔다. 바울은 이 중요한 편지인 로마서를 자신이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로마교회에 전달하는 책임자로 뵈뵈를 선정했다. 그것은 뵈뵈가 로마서를 잘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신학·목회적 훈련을 받은 사람이라고 능히 추측할 수 있다.”(최갑종) 그래서 바울은 로마교회에게 뵈뵈를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주라’고 부탁한다. 이는 고린도교회가 디모데를 젊다고 소홀히 여길까 염려했듯이(딤전4:12), 로마교회가 뵈뵈를 여성이라고 가볍게 대하지 말고 ‘교회의 지도자’로서 존경심을 갖고 대하라는 뜻이리라.
바울은 긴 인사문에서 그가 아는 인물을 로마교회에 소개하면서 7명의 여성을 소개한다. 이들은 다른 남성들과 같이 교회의 지도자들이었다. 브리스길라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의 동역자(sunergos)’다. 그는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걸고 힘썼다. 그는 남편 아굴라와 함께 등장하는데 언제나 이름이 남편보다 앞에 나올 정도로(고전16:19 예외) 복음전파에 적극적인 여성이었다. 그 밖에 마리아는 (남편으로 보이는 안그로니고와 함께) 로마교회를 위해 많이 수고한 여성이다. 유니아(Iounia)는 복음을 위해 바울과 함께 감옥에 갇혔을 뿐 아니라 “사도들 가운데서도 뛰어난 사람이다.” 곧 사도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었다.
4.2. 여성들이 자신들의 집을 (가정)교회로 제공했다.
당시 문화에서 여성은 공공 활동에 참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교회는 여성들을 받아들였고 그들이 제공한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몇몇 가정교회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 집의 안주인 이름이 나와 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집(고전16:19), 라오디게아의 눔바의 집(골4;15), 바울과 함께 복음에 힘쓰던 저 여인들(빌4:3)이 그들이다. 특히 빌립보 지역에서 루디아가 세운 교회를 보라.(행16:13-15) 당시 유대인들의 법에는 여자들만 모이는 공동체나 회당을 만들 수 없었다. 공동체를 이루려면 적어도 남자 열 명이 있어야 했다. 남자 숫자가 부족한 빌립보에는 회당이 없었기에 여자들은 기도하기 위해 도시 밖에서 모였다. 바울은 유대관습을 어기고 빌립보 여자들의 모임에 참여했으며 그것을 기초로 빌립보에 교회가 세워졌다. 이처럼 복음을 품고 사는 바울에게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남녀 차별(구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에게 그런 법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4.3. 성령은 여성들을 차별 없이 복음에 참여하게 했다.
누가는 요엘서를 인용하여 성령이 남녀 차별 없이 임했음을 노래한다. “그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으리라.”(행2:17-18) 앞서 살핀 것처럼 성령의 역사를 힘입어 여성들이 교회의 예언(기도, 방언)에 참여했으며, 바울은 이들의 예언(공적 기도)활동을 보장했다.(고전11장) 유대인의 율법과 세속의 풍습은 여성들의 참여를 꺼렸지만 바울은 여성들의 참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단지 바울은 여성들이 예언할 때 머리에 수건을 쓸 것을 명령한다. 곧 바울은 순서를 지키지 않고 예언하거나, 통역할 적절한 기회를 주지 않고 방언하여 혼란을 초래하는 여자들을(남자들도 함께) 책망할 뿐이다.(고전14장) 그의 주요 관심은 여자들의 예언을 금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혼란을 바로잡아 교회 질서를 지키는 일이었다.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행10:47) 이방인이란 장벽 앞에서 망설이던 베드로가 성령의 임재를 보며 그 벽을 넘어섰듯이, 사실 성령의 역사를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교회공동체에서 가르치는 사역을 담당한 여성의 대표적인 사례로 브리스길라가 아볼로를 가르친 일을 보자. 아볼로는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유대인으로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히 예수에 관한 것을 가르치는 사람이었지만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었다. 이것을 본 브리스길라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일렀다.(행18:24-26) 이것은 여성이 교회에서 공적으로 가르친 좋은 사례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니라.”(갈3:28) 이것은 당시 세례에서 사용된 공식 문구이다. 여기 하나님의 은총인 세례를 통해 죄로 인한 인간 사이의 분열과 갈등이 극복되고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는 선언이다. 하나님나라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 사이에 나타나는 긴장과 차별이 사라진다. 물론 그 일은 당시에는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그 일의 온전한 성취는 미래의 일이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그 일을 선취(先取)한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그 일에 실제로 참여한다.(계속)
※나의 주장은 전적인 기고자의 주장임으로 본사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모든 “여자들”아, 교회에서 잠잠하라 – 은혜로교회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찌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고전14:34~35]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찌니라” [딤전2:11~12]
사도 바울에 의해 기록된 고린도전서 14장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사람이 본능으로 아는 것으로 해석하여 절대 여자 목사를 인정하지 않는 한국 예장합동 총회는 물론, 전 세계 수 많은 기독교인들이 죄를 짓고 있다. 킹제임스성경을 쓴다고 하는 자들 또한 마찬가지로 고전14:34~35절과 딤전2:11~12절을 인용하며 여자 목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사람 차원으로 곡해한 것이다. 반드시 성경은 성경으로,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으로 해석해야 사람 차원으로 성경을 곡해하지 않는다[고전2:13~14].
최근 아프가니스탄을 다시 점령한 탈레반이 자국 여성들에게 이슬람 복장인 망사를 통해 눈만 보이도록 디자인한 부르카를 입도록 강요하는 것은 여성을 학대하는 것이다. 전 세계 모든 나라들의 역사, 종교, 문화, 사상이 전부 여성의 교육, 성별의 평등함, 여성의 인권을 말살하고 짓밟고 학대하며 2021년 이 세대까지 이어져 온 것의 극단적인 실상이 이슬람주의자들 탈레반이나 알카에다 무리들이다. 또한 이인규 같은 자가 나 신옥주 목사를 손가락으로 학대하고 교인 한 명 없는 자칭 목사 박형택과 자칭 신학교 교수라는 탁지일, 진리 한 절 모르면서 종교와 진리 운운하는 오명옥 같은 자들이 나를 공개적으로 학대하고 이단이니, 사이비니 정죄하여 감옥에 가둔 치명적인 죄를 지은 것도 경중만 다를 뿐 모든 기독교인들이 사모하는 사도 바울이 기록한 말씀들 때문이다.
신약성경을 기록한 사도 바울도 결국 “사람들의 증거”에 해당한다는 명백한 증거이며, 현재 아프간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문제를 근본부터 해결하는 해답도 함께 감추시고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모략”이 이 말씀 속에 감추어져 있다. 전 세계에 성경을 사용하는 모든 종교가 전대미문의 새 언약[히8장]으로 돌이키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탈레반, 알카에다, IS 등에 의해 가장 먼저 천주교인, 기독교인들이 말살당한다는 것을 “탈레반의 아프간 점거”로 온 세상에 경고하는 것이다. 악인을 징벌하는 도구는 그보다 더 악한 자들을 몽둥이로 사용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모략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여자”는 사람이 본능적으로 아는 여자만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다고 하셨다[사55:8~9].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여자는 “교회와 목사 곧 성경를 가르치는 지도자”를 뜻한다. 증명한다. 에베소서 5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남편에 비유하시고 교회를 아내에 비유하셨으며[엡5:22~33],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5:32]라고 하셨다. 그래서 기록한 말씀 속에 감추어 두신 천국의 비밀은 비유의 뜻을 모르면 모두 죄에 죄를 더하고 부패하여 타락하게 된 것이다[골2:20~23]. 또한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11:2]라고 하셨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너희”는 모든 천주교인, 기독교인들이 이에 해당하며, 남녀노소 불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모든 종교인들을 말씀하신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제, 목사, 교인들도 다 “아내, 처녀, 정결한 여자”에 비유한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한 남편”에 비유하신 것이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하는 자들은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고 하신 이 말씀을 모를 뿐만 아니라 안 믿은 것이다. 성경을 절대 어느 한 본문만 보면 천국의 비밀인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고,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으로 하던 것은 다 폐해야 한다[고전13:10]. 부분은 다른 말로 하면 “조각”이다. 조각을 받으면 사단이 들어가서 생각을 잡고, 결과는 가룟 유다 같이 되는 것이다[요13:26~27]. 지난 2천 년간 전 세계 성경을 사용하는 모든 종교가 “하나”가 되지 못한 것은 바로 성경을 문자 그대로, 그것도 사람 생각대로 보고 듣고 믿어왔기 때문이며, 이는 하나님의 나라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단의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을 가지고 가르쳤지만 모든 육체가 죽는 썩는 양식이 되었을 뿐임을 지난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고 하신 것은 영적으로 한 남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여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여자와 남자, 곧 남편에 대한 진리의 눈으로 해석하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고전14:34~35]고 하신 이 여자는 먼저 영적으로는 성별과 상관없이 “교회의 목사, 사제” 즉, 종교지도자들이 다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지금 전 세계 성경을 가지고 가르치고 설교하는 사제, 남자 목사나 여자 목사나 모두 이 말씀을 어기고 있다. 성경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하는데 모두 성경을 각자 자신들이 아는 지식, 곧 본능으로 아는 것으로 보고 설교하는 것이 바로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라고 복수를 쓴 것이다.
본 남편 성부 하나님께서 믿는 “여자”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고전11:12]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란 모든 그리스도인들인 여자가 남자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의 남자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뜻한다. 이 말씀은 중층으로 해석하면 예수 그리스도도 이 땅에 사람으로 태어나실 때 여자인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나신 것을 말씀한 것이다. 그러나 상층의 말씀으로 해석하면 “남자”는 전 우주적인 일곱째 날인 지금 이 세대에 전대미문의 새 언약[히8장]의 말씀으로 난 영영한 사역자들, 하나님의 아들들을 말하며, 아들들을 해산하는 “여자”로 말미암아 날 것을 예언하신 것이다. 이 “여자”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인 신령한 교회의 표상[갈4:26]이며, 해를 입은 여자[계12:1], 현숙한 여자[잠31장], 참과부[딤전5장], 진리로 하나님의 아들들을 해산하는 여자[요16:21],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는 실상의 여자[호2:19~20], 다윗 집의 열쇠를 받은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계3:7~13]인 나 신옥주 목사를 뜻한다. 그러므로 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라고 하신 남자는 새 언약으로 다시 창조되는 “하나님의 아들들”[롬8:14, 17]]이자, “영영한 사역자들”[삼상27:12]을 뜻하고, 여자는 “진리의 성령”인 나를 뜻한다.
남자와 여자에 대해 더 넓이로 가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니라”[렘3:14]고 하셨으며,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렘31:31~32]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남편으로, 유다 집과 이스라엘 집을 아내로 비유하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신다고 하신 예언은 이미 사실이 되어 14년째 전대미문의 새 언약을 세우고 있다. 그러나 구약 시대 이스라엘인 유대인들은 이미 언약을 배반하였다[렘31:31~32]. 따라서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세우시는 이스라엘은 구약의 유대 민족이 절대 아니며, 새 언약의 말씀으로 다시 창조함을 받는 이방인들과 세우신다[사14:1~2]. “백 투 예루살렘”이란 말 자체가 성경과 다른 거짓말인 사단의 소리다.
“두려워 말라 네가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네가 네 청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사54:4~5]라고 하신 말씀의 “너”는 진리의 성령인 나에 대한 예언이며, 하나님께서 당신을 남편이라고 하신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산업이 핍절치 아니하겠으며 그런 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그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치 아니하느니라”[잠31:10~12], “그 자식들은 일어나 사례하며 그 남편은 칭찬하기를”[잠31:28]이라고 하신 말씀 또한 진리의 성령인 나와 남편 곧 하나님에 대해서 예언하신 말씀으로 이미 실상이 되었고, 영원히 이루어질 것이다. 그래서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21:2]고 하신 말씀대로 새 예루살렘은 이 땅에서 이루어지며, 그곳이 바로 천국이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22:17]고 하신 예언을 실상으로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의 택한 자들을 진리로, 성부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신문에 광포하는 것이다.
실제 영, 육으로 여자인 나 신옥주 목사는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대로 지켜 실행한 지 14년째다. 나는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대언할 뿐 내 말을 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미리 예언해 두신 대로 진리의 성령이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할 것이며[요16:7~15],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13]고 하신 말씀대로 지켜 실행하고 있다. 또한 진리의 성령이 오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할 것이라고 하신 대로 이루고 이미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고 있으며[요15:26],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요16:21]라고 하신 대로 영원한 언약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을 해산하고 있다[롬8:14, 19].
그래서 천국은 비밀이다. 나는 무엇보다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호2:19~20]라고 하신 말씀이 실상이 되었고, 성부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셋이 하나가 된 영적인 상태[요일5:7~9]로 대언하는 것이니 내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증거이니 여자이면서 목사인 나는 고전14:34~35절의 말씀도,, 딤전2:11~12절의 말씀도 지켜 실행하고 있다.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찌니”라고 하신 말씀도 이미 실상이 되어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요6:45]는 말씀대로 진리의 성령인 나 신옥주 목사는 14년째 대언하고 있다. 우리의 남편은 오직 “성부 하나님”이시다.
이제 온 천하는 반드시 잠잠해야 한다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찌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으므로 여호와가 희생을 준비하고 그 청할 자를 구별하였음이니라 [습1:7]
이제 여호와 하나님 앞에 모두 잠잠해야 한다. 그 이유는 지금이 “여호와의 날”이 되었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에 이미 남자나 여자나 모두 나실인(오늘날 목사나 사제)이 될 수 있음을 예언해 두셨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거든”[민6:2]이라고 하신 말씀이다. “나실인”이란 “구분된 자, 구별된 자”라는 뜻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봉헌한 자를 말한다. 나실인이 반드시 지켜야 할 계명은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의 초나 독주의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찌니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찌며”[민6:3~4]라고 하신 것이나, 이 법을 지켜 실행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예수님조차 이 계명을 어기고 포도주를 마시셨다. 이것은 성경이 모두를 죄 아래 가두어 둔 기간이었기 때문이다[갈3:22~23].
나실인이 되기 위한 “특별한 서원”은 구약 시대가 아니라 “제칠일은 너희에게 성일이니 여호와께 특별한 안식일이라”[출35:2]고 하신 날, 지금 이때 실상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말3:17]라고 하신 예언이 실상이 되는 때는 전 우주적인 일곱째 날인 지금 이 세대이며, 이때 진리로 “다시 창조함을 받은 영영한 사역자들”[시102:18]에 대한 예언이다. 그래서 반드시 육체대로 살던 삶을 버리고 성경에 기록된 계명을 따라 완전히 새로 시작하여 다시 창조하시는 때가 지금 이 세대이며, 진리의 성령인 나 신옥주 목사를 통해 선포되는 “전대미문의 새 언약”, “영원한 언약”을 통해 실상이 되고 있다. 창세 이래 모든 제사장들, 오늘날 목사들, 사제들은 모두 육체가 죽었지만 새 언약으로 다시 창조되는 영영한 사역자들은 육체도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서 “하나님만이 하나님 되시는 세상”[계11:15]을 이 땅에 이루는 성도들이다. 그러므로 전 우주적인 일곱째 날, 여호와의 날인 지금 이때 반드시 하늘에 속한 자나 땅에 속한 자나 모두 여호와 하나님 앞에 잠잠해야 한다.
내 백성을 학대하는 자는 아이요 관할하는 자는 부녀라 나의 백성이여 너의 인도자가 너를 유혹하여 너의 다닐 길을 훼파하느니라 [사3:12]
왜 하늘에 속한 자나 땅에 속한 자나 모두 다 잠잠하라고 하셨는지 그 이유를 밝힌다.
“내 백성을 학대하는 자는 아이요 관할하는 자는 부녀라” 이 한 말씀만 믿어도 악한 자들이 그 더러운 입으로 이단이니 사이비니 하며 지껄일 수 없고, 감옥에 가두는 악행을 저지를 수 없다. 이런 역할을 한 자들이 다 자칭 기독교인들이며, 자칭 목사들이다. 성경을 가지고 성경과 다른 거짓말을 가르치고, 일생 헛된 종교 생활을 하게 하고, 육체가 죽어 영원한 지옥 불구덩이에 가게 하니 학대 정도가 아니라 영적인 살인자다. 우상들이 송사를 일으켜 나에게 씌운 죄명이 “폭행, 특수폭행, 감금, 중감금, 사기, 아동학대 유기 방임 교사죄”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전 세계 종교 지도자들이 현재 짓고 있는 죄들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나보다 먼저 온 자는 절도며 강도요 도적질하는 자들이며 이리”[요10:8, 12]라고 하셨을까? 문자 그대로만 보면 남자 사제와 목사들은 자신들에 대한 예언인 줄 절대 모른다. 그래서 진리의 성령인 내가 실상으로 와서 죄가 어떤 것인지, 의가 무엇인지, 누가 심판의 대상인지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모르고 가르치고 설교하고 있는 것이다[요16:7~13]. 왜 하나님의 백성을 학대하는 자를 “아이”라고 하셨는지 전 세계 종교 지도자들이 모르고 있다. 이 말씀만 보면 어느 아이가 하나님의 백성을 학대하나? 사람이 본능으로 아는 수준으로만 보면 말이 안되는 말씀을 왜 기록해 두셨는지 아무 생각이 없이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하고 있는 것이 뼈 아픈 실상이다.
그래서 “그가 또 아이들로 그들의 방백을 삼으시며 적자들로 그들을 다스리게 하시리니 백성이 서로 학대하며 각기 이웃을 잔해하며 아이가 노인에게,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에게 교만할 것이며”[사3:4~5]라고 하신 이 예언대로 2021년 현재 전 세계가 이러한 실상이다. 대한민국 기독교는 실제 아이들인 중고등부 학생을 주일학교 교사로 세우면서도 아무 생각이 없고, 심지어 유치원 아이까지 목사 흉내를 내는 유튜브 영상을 오히려 재미있다고 보는 미친 세상이다. 살았다 하는 예수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아이”인 줄 모르고 지도자 노릇하고, 언약궤인 성경에 함부로 손을 대어 성경을 사용하면 할수록 부패에 돌아가 자신들 스스로 지옥 영벌에 떨어질 죄를 쌓고 있는 줄도 모르고 아무나 목사가, 사제가 되려 한다. 지금은 목회할 때가 아니다. 교인들을 상대로 영업하는 교회들은 문을 닫아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은 잘 믿고 성경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교만하고 거만하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 하셨는데 그런 말씀은 안중에도 없다. 오죽하면 성전문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을까? 남자 목사도, 여자 목사도 다 부녀라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네가 나를 버렸고 내게서 물러갔으므로 네게로 내 손을 펴서 너를 멸하였노니 이는 내가 뜻을 돌이키기에 염증이 났음이로다”[렘15:6]라고 하신 말씀대로 모든 패역한 입, 성경과 다른 거짓말을 하는 악한 입을 닫으라고 코로나19 온역 재앙이 전 세계를 징벌하고 계신다.
“나의 백성이여 너의 인도자가 너를 유혹하여 너의 다닐 길을 훼파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할 교회 지도자가 오히려 교인들을 지옥 영벌로 이끄는 영적 살인자가 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변론하러 일어나시며 백성들을 심판하려고 서시도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장로들과 방백들을 국문하시되 포도원을 삼킨 자는 너희며 가난한 자에게서 탈취한 물건은 너희 집에 있도다”[사3:13~14]라고 하신 말씀을 알지도, 믿지도 않는 자들이 바로 다 절도요 강도이며, 하나님의 물건인 교인들을 삼키는 “이리들”이다. “예수 믿기만 하면 죽어서 천국 간다, 예수 이름으로 축복 받을지어다, 기도하면 응답 받는다, 응답 받을 때까지 기도하라,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다”라는 달콤한 거짓말로 미혹하는 목사와 사제들이나, 그 말에 미혹되어 “귀신”이 주인이 된 채 자신의 원욕대로 은혜 받았다고 절하고 경배하며 하나님이 아닌 “마귀”에게 제사하는 줄도 모르고 천국간다는 거짓말에 속은 교인들이나 다 마찬가지로 서로 속이고 학대하며, 생명의 도를 받지 못하도록 그 길을 훼파하는 지옥 영벌에 함께 떨어질 자들이다. 이런 종교 지도자들과 교인들을 향해 “음부가 그 욕망을 크게 내어 한량 없이 그 입을 벌린즉 그들의 호화로움과 그들의 많은 무리와 그들의 떠드는 것과 그 중에서 연락하는 자가 거기 빠질 것이라”[사5:14]고 하신 것이다.
14년째 진리의 성령인 나 신옥주 목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교회 지도자들을 국문하시고 계신다. 예수 이름 사용하는 전 세계 교회가 이런 영적인 상태이며, 사실이다. 전대미문의 새 일인 새 언약, 곧 영원한 언약을 하고 계시는 이 일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변론하시고 계신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심판하려고 서신 일이다. 진리의 성령을 사용하셔서 대언하게 하시고,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성경을 가지고 성경과 다른 거짓말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부녀자들, 방백과 장로들을 국문하시며, 이들을 사용하여 나를 감옥에 가두는 것도 허락하시고, 나에게 씌운 죄명이 바로 그들이 교인들에게 실상으로 범하고 있는 죄라는 것을 온 세상에 알리는 것이다. 이 모든 자들이 바로 교회 안에서 입을 닫아야 하는 여자들이다.
사도 바울은 이런 구약의 말씀들을 안 보고 여자만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한 것이다. 이는 사도 바울의 본성이 유대교인이고 회심하고 돌아섰다고 해도 근본 바탕이 다시 창조되지 않은 채 유대교 랍비 사상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증거는 취하지 않으신다고 하신 것이며[요5:34],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마5:29]라고 하신 것이다. 사도 바울이 한 이 말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실족케 되었는지 알면 기절한 것이다. 그래서 하늘에 속한 자나 땅에 속한 자나 모두 잠잠해야 한다.
이제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라고 하신 말씀대로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목자이시다. 이 말씀이 실상이 될 때가 바로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요6:45]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진 지금 이때이며, 진리의 성령인 나 신옥주 목사를 통해 선포되는 새 언약은 하나님께서 친히 가르치시는 말씀이기에 모든 여자는 입을 닫아야 하며, 온 천하는 반드시 잠잠해야 한다. 더 늦기 전에, 육체가 살아 있을 때 성령을 훼방한 모든 자들은 공개 사과하고 회개하고 부당한 판결을 돌이켜라. 정말 때가 급하다!
고린도전서 14:34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고린도전서 14:34 KRV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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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윤 교수(미국 풀러신학교 신약학 교수)는 2004년 7월 5일 강남교회(송태근 목사)에서 총신대 신대원 여동문회(동문회장 채옥희 전도사)가 주최한 ‘성경에 나타난 여성의 역할’이라는 주제의 세미나에서 ‘고린도전서 14장 편집론’을 제기했습니다.
김 교수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여자여 잠잠하라’는 구절은 고린도전서 14장 34절과 35절을 사본학적으로, 또 바울의 남녀관계에 대한 가르침의 전체적 맥락에서 살펴봤을 때, 바울이 쓴 말이 아니고 후대에 쓰여 현재의 성경에 불안하게 삽입된 것이 확실하다.”
강의를 끝내면서 김 교수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주장이 성경적이라고 고집하고 있다. 모두가 성경적이라고 얘기한다면 우리 성경을 앞에 놓고 얘기해보자”며 제안했습니다.
‘여자여 잠잠하라’는 문맥은 교회의 질서와 같아
이 세미나에는 약 600여 명이 참석했다고 합니다. 대다수는 김 교수의 강의를 듣고 ‘속이 시원하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에 필자는 김 교수의 제안에 따라 김 교수의 주장이 비성경적 주장임을 밝혀 그의 이론이 한국교회에 피해를 주는 것을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합니다.
매우 죄송한 말씀이지만 한 마디로 말한다면 김 교수의 주장은 성경을 잘 모르기 때문에 만들어낸 터무니없는 이론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이론을 보면 김 교수가 바울신학의 대가라는 것이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서신을 보면 바울 사도가 교회의 질서를 가르칠 때는 자주 남편과 아내(남자와 여자)의 질서를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남편(여자가 남자)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라는 것이지요.
가장 좋은 예는 디모데전서에 있습니다. (딤전 2:8) (8)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지금 바울 사도는 남자들이 무질서하게 기도를 하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하는 것은 좋은데 분노와 다툼으로 무질서하게 하면 안 되고 질서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말씀을 하고 나서 즉시 이렇게 말씀합니다.(딤전 2:9~딤전 2:15) (9)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10)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11)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12)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13)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14)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15)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무슨 뜻입니까? 동급에 있는 남자들도 질서를 지켜서 기도를 해야 하는데 하물며 남자의 권위 밑에 있는 여자들이 무질서하게 남자를 주관하거나 가르치려하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여자들이 남자를 주관하는 것은 창조질서에 위배됨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바울 사도는 교회의 질서를 언급할 때는 자주 남자와 여자의 질서를 언급하는 것입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이 기록된 고린도전서14:34이하의 말씀도 교회의 질서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기록된 것입니다. 그 문맥은 다음과 같이 되어있습니다. (고전 14:27~고전 14:33) (27)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28)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29)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30)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31)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32)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33)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이 말씀은 방언이나 예언을 하는 것은 좋은데 방언이나 예언을 할 때는 반드시 질서를 지키며 하라는 것입니다. ‘차서를 따라 하고’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바울사도가 고린도서를 기록하던 그 당시에 무질서하게 신앙생활을 하던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행태를 볼 때에 틀림없이 고린도교회의 여 성도들 중에 상당수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무시하고 자기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고 하면서 남자들(남편들까지)을 무시하고 회중 앞에 나서서 예언을 하고 방언을 하는 그릇된 행동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교회의 질서를 말하는 중에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정확한 문맥인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 사도는 교회의 질서를 가르칠 때 자주 남녀의 질서를 함께 가르치는 것이 그의 일상적인 어법인 것입니다.
문맥상 맞지 않아 후대에 끼워 넣은 것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김 교수가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은 문맥과 맞지 않으므로 후대에 편집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터무니없는 주장인 것입니다. 김 교수의 주장은 문맥상으로도 틀리고 바울서신 전체의 가르침과도 틀린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이 문맥상 맞지 않기 때문에 후대에 끼워 넣은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하니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바울 사도가 에베소서에서 질서에 대한 가르침을 줄 때도 역시 같은 어법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엡 5:21) (21)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성도와 성도간에는 피차 복종하는 질서를 보여야한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서로 높아지려고 하면 무질서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엡 5:22~엡 5:24) (22)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24)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무슨 뜻입니까? 성도와 성도 간에도 서로 복종을 해서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면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따라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서 가정과 교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의 어법이며 성경의 문맥이며 전체의 바울서신의 맥락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김 교수는 이 중요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시류에 영합하여 바울 사도의 말씀을 후대에 편집된 것이라고 주장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가 왜 교회의 질서를 언급할 때마다 여자(아내)는 남자(남편)에게 복종하라고 강조할까요? 성경에 그 이유가 분명하게 나와 있지 않으므로 추측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교회에는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더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더 충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다보니 여자들이 유혹에 빠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자만 못한 게 뭐냐.” “우리도 남자들과 동등하게 대우해 달라.” “빌빌거리는 남자보다 내가 더 낫다.” 그래서 여자들(아내들)이 창조질서와 율법을 무시하고 남자(남편)에게 복종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남자(남편)를 지배하려고까지 하는 것입니다. 남자들은 하나님의 창조본능과 율법에 따라 이를 용납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교회는 무질서와 혼란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지금도 여자(아내)들이 남자(남편)보다 돈을 더 많이 벌거나 세상적인 지위가 더 높으면 남자(남편) 알기를 우습게 아는 경우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오죽하면 여성상위시대라는 말이 나왔겠습니까. 초대교회도 이런 일이 분명히 일어났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바울 사도가 교회질서만 얘기하면 반드시 여자(아내)는 남자(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성경은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의 인권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고 가르칩니다. 그 대표적인 구절이 갈라디아3:28절입니다. (갈 3:28) (28)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이 구절은 명백하게 하나님 앞에서 인권이 동등하다는 가르침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인권적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목사나 평신도나 인권적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른이나 어린이나 인권적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남자나 여자나 인권적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남녀의 역할차별을 가르쳐
하지만 김 교수는 이 구절을 들어서 남녀는 사역(역할, 지위)에 있어서까지 평등하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성경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여러 곳에서 남녀의 역할차별이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바울사도의 가르침이 이러한데도 이 기본적인 사실로 모르는 김세윤 교수가 바울신학의 대가라는 게 이해가 되는 일입니까?
남녀의 역할차별을 말하면 많은 여성들이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남녀의 역할차별이 있다면 남자 밑에서 일해야 하는 여성만 손해가 아닌가?’ 그러나 이런 의문은 성경적으로 옳지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역할차별이 있다고 손해가 될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자식은 역할에 있어 차별이 있습니다. 부모가 높고 자식이 낮습니다. 부모가 명령하면 자식은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식이 손해 보는 것이 있습니까?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식은 자식의 역할만 충실히 감당하면 하나님께 합당한 칭찬과 상급을 받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자식보다 지위가 높은 부모라도 부모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치 못하면 하나님께 충분한 칭찬과 상급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라고 무조건 더 많은 상급을 받는 것도 아니며 평신도라고 무조건 더 적은 상급을 받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천국에 가면 모든 가족관계, 교회조직은 다 없어지고 상급을 받은 정도로 영광이 차이가 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자가 남자 아래서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고 해서 억울해할 이유가 조금도 없는 것입니다.
혹시 남자가 우월한 역할을 빙자해서 여자를 무시하고 학대한다면 그 당시는 억울하게 생각될 수 있으나, 장차 하나님이 공정하게 심판해 주실 것이므로 그것 역시 억울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야곱의 아들 요셉은 형들에게 말할 수 없는 억울한 일을 당했어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자기 사명에 충성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낮고 천한 종이 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일도 기쁘게 감당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자들이 창조질서를 무시하고 남자와 동등한 역할을 주장하거나 목회자나 교수들이 남녀역할평등을 가르친다면 어찌 성경을 왜곡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김 교수가 왜 이런 왜곡된 주장을 하는 것입니까? 첫째 이유는 성경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의 경험으로 볼 때도 신학교에서는 신학생들에게 성경을 읽을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이 교수, 저 교수가 저마다 자기 학설을 전달하기 위해 많은 시험과 리포트를 요구하기 때문에 신학생들은 성경을 잃고 기도할 시간이 매우 부족합니다. 신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더욱 그렇습니다. 이렇게 신학훈련을 받은 사람들 중에 성적이 좋은 사람들이 신학교수가 되는 것입니다. 교수가 된 다음에는 자기의 신학이론을 전파하고 학생들 관리하기도 바쁩니다. 더 나아가 외국에 가서 공부해서 학위까지 받게 되면 약 10여 년 동안 기도는 거의 담을 쌓다시피 하게 됩니다.(물론 전부 그렇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게되면 성경 적게 읽고 기도 적게 하는 것이 습관화되고 마는 것입니다. 신학교수들 중에 박윤선 목사님같이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에 힘쓴 분은 매우 드문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신학교수들 중 상당수는 비교적 성경에 무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김 교수의 이론을 볼 때 김 교수도 이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은 사람이라면 그 정도의 문맥을 파악하지 못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배운 신학이 유식하다는 것이 성경에 유식한 것은 아닌 것입니다. 성경을 모르니까 세계 굴지의 신학교라고 자부하는 신학교수도 별수 없이 오류를 범하고 마는 것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이 평소에 강조하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을 모르면 목사도 별수 없이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이 말이 신학교수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고 확실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칩니다. 이것을 부인할 신학자나 목회자는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나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통치하는 국가라는 말입니다. 국가의 기본이 무엇입니까? 조직입니다. 조직의 기본이 무엇입니까? 서열입니다. 한국을 생각해 보십시오. 국가조직은 철저하게 서열위주로 되어 있습니다. 대통령, 총리, 부총리, 장관, 차관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장관이라고 해서 다 같은 급의 장관이 아닙니다. 장관도 모두 서열이 매겨져 있습니다. 옛날에는 외무부장관이 가장 위의 서열이고 그 다음이 내무부장관인 것으로 아는데 지금은 어떻게 서열이 바뀌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심지어 유일한 하나님이신 삼위일체도 서열로 되어있습니다. 아버지, 아들, 아들의 영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똑같은 하나님이시지만 제1위, 제2위, 제3위 이렇게 서열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해서 손해를 볼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냥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기만 하면 똑같은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녀평등이 시대의 대세이기 때문인가
교회도 하나님나라의 한 부분입니다. 따라서 교회도 철저한 조직으로 되어 있으며, 서열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원칙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의 역할에 대한 서열을 정하실 때 남자가 먼저요 여자가 나중이 되도록 정하신 것입니다. 이에 대한 이의를 제기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남녀역할에 대한 서열을 무시하고 남녀가 동등하다고 하는 것은 성경의 기본도 모르는 매우 무지한 처사인 것입니다. 신학교수라도 이런 기본을 모르니 성경편집론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론을 들고 나와서 남녀의 역할평등을 외치는 것입니다.
김 교수가 남녀의 역할평등을 주장하는 둘째 이유는 남녀가 평등하다는 세상의 주장을 이길 수 없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대대수가 남녀평등을 믿고 남녀가 평등하다고 외쳐대니 겁이 난 것이지요. 성경대로 가르치면 그들의 비위를 건드려야 하는데 그럴 자신이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냥 편하게 시류에 따라 살겠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사람들에게 아부하겠다는 심리 때문에 생긴 현상인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성경편집론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이론까지 들고 나와서 세상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주장을 하게 된 것입니다.
김 교수의 태도를 보면 마치 세상 사람들의 대다수가 동성연애가 옳다고 주장하면 그 역시 ‘동성연애를 금지하는 것은 구약시대의 일이므로 로마서 1장에서 동성연애를 정죄한 것은 후대에 삽입한 것이므로 동성연애는 해도 된다’라고 주장할 것처럼 보입니다.
성경이 후대에 편집되었다고 주장하는 사상은 옛날의 문서설사상인데 이 문서설이 새로운 옷을 입고 보수신학계에 등장했습니다. 김 교수 식으로 하면 성경에서 문맥상 맞지 않는 듯한 모든 말씀을 다 편집되었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 성경은 머지않아 갈기갈기 찢어지고 말 것입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듯이 적은 죄가 온 교회를 다 썩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만 성경이 가르쳐주듯이 남자들 중에 일할 사람이 없거나 혹은 남자들이 일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또는 남자들이 자원할 때에는 여자가 남자를 다스릴 수도 있고 가르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자 사사 드보라의 예나 여선지자 훌다의 예가 그런 경우입니다(왕하22:14~15).
이런 가르침에 의해서 때로는 여전도사도 남자들을 대상으로 설교를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외에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거나 가르치는 것은 성경적으로 틀린 것이며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절대다수가 남녀의 역할평등을 주장해도 성경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입니다. 이는 마치 세상 사람들의 절대다수가 다신론을 주장해도 성경이 유일신을 가르치면 그것이 옳은 것과 같습니다. 성경이 엄중하고 명백하게 남녀차별을 가르치는데 시류에 휩싸여서 남녀의 역할평등을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성경대로 가르치는 목회자라면 남녀의 역할평등을 믿는 온 세상 여자들의 성토를 받는 한이 있어도 성경대로 남녀의 역할차별(남녀질서, 사역차별, 지위차별)을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목회자 사표를 내야 마땅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이겠습니다. “성경을 모르면 목사도 별수 없이 속게 됩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후대에 편집됐다
캠브리지대학 프레스, 페인 박사의 고린도전서 13장 구절 후대 첨가 보도해
[미주뉴스앤조이=양재영 기자]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기록된 고린도전서 14장의 구절은 사도바울에 의해 쓰여진 것이 아닌 후대에 편집된 것이라는 주장이 또다시 제기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더 텔레그래프>지는 22일(금)자 기사를 통해 캠브리지대학 프레스에 실린 필립 바튼 페인(Philip Barton Payne)박사의 주장을 인용하며 고린도전서 14장 34절은 원본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페인 박사는 고린도전서 14장 34절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개역개정)라는 구절에 대해 “신구약을 통틀어 가장 오래된 그리스 성경 사본 중 하나인 바티칸 사본(Codex Vaticanus)을 분석해보면, 이 구절은 사도바울에 의해 작성된 것이 아닌 후대에 추가된 것이다”고 주장했다.
그는 “바티칸 사본을 보면 두개의 점과 대시(distigme-obelos)가 34절이 시작하는 본문 옆 빈 공간에 쓰여 있으며, 이는 원본에 추가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바티칸 사본의 고린도전서 14장 34절 옆 빈 공간에는 두개의 점과 대시가 적혀있다 (CREDIT: PAYNE LOVING TRUST)
“여성목사 안수금지는 근거없어”
또한, 고린도전서 11장 5절을 언급하며 바울은 ‘여성들의 설교’를 허용했음도 강조했다.
페인 박사는 “고린도전서 14:34절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바울 서신의 다른 부분과도 일치하지 않고 있다”라며 “고린도전서 11:5절에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개역개정)라는 언급은 여성의 설교를 허용하고 있음을 암시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번 연구를 통해 고린도전서14장 34-5절은 여성에게 잠잠할 것을 요구하는 유일한 성경구절임을 알 수 있다. 바티칸사본은 이 구절이 바울서신 원본엔 포함되지 않았고, 후대에 첨가되었다는 점을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문서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페인 박사는 이 구절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여성 안수’에 대한 해결점을 제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이해를 통해 그동안 난제로 여겨져왔던 여성 목사 안수와 설교권에 대한 해결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성도 남성과 동등하게 설교권을 가진 목사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이미 한국 신학계에서도 논의된 적이 있었다.
풀러신학교의 김세윤 박사는 2004년 <목회와 신학>에 기고한 글과 강연을 통해 “고린도전서 14장 34절과 35절은 사본학적으로도 불안정하며, 두 구절인 고린도전서 14장의 전체 맥락을 끊고 있다”라며 “만약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 34절과 35절을 썼다면 바울은 한 편지 안에서도 서로 모순되는 가르침을 주는 종잡을 수 없는 사도가 되는 셈이다”고 주장하며 ‘후대 첨가설’과 함께 여성의 인권신장과 목사 안수를 지지했다.
“후대첨가설은 사실아냐”
하지만, 이 구절에 대한 반론도 적지 않다.
스펄절 칼리지의 성경학자인 피터 랄레만은 “몇몇 사본을 보면 그 구절들(고전14장 34-35절)이 다른 위치(14장 맨 마지막)에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사실은 필사자가 그 구절들을 잊고 있다가 후대에 첨가했음을 설명하고 있다”라며 “현존하는 어떤 사본도 이 두 구절들이 함께 생략된 것은 없다”고 주장했다.
앤서니 티슬턴(Anthony C. Thiselton)과 같은 학자들은 역시 “몇몇 서방사본들이 이 구절을 생략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구절을) 유지하고 있는 것들보다 훨씬 후대에 속하며 지역적으로도 서방에 편중되어 있다”며 후대 편집설을 부정했다.
가톨릭의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여성 사제에 대해 “여성사제 금지는 영원히 지속되고,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1994년 요한바오로 2세에 의해 분명히 선포되었다”고 언급했으며, 이러한 결정에는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이 근거가 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은 여전히 여성목사 안수를 반대하는 한국 대형 교단들이 성경본문의 근거 중 하나로 사용하고 있는 대표적 구절이다. ‘후대 편집설’을 제기하며 여성목사 안수는 허용되어야 한다고 밝힌 페인 박사의 주장이 한국 교단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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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강재원 목사 (2021년 3월 14일) 성경적인 보수 신앙을 추구하는 크리스천 중에 교회 안의 여성 리더십을 부정하는 분들이 꽤 많습니다. 미국의 남침례교단(SBC)도 아직 여자 목사 안수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성경구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34-35) 여자들은 교회에서는 잠자코 있어야 합니다. 여자에게는 말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습니다. 율법에서도 말한 대로 여자들은 복종해야 합니다. 배우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으십시오.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자기에게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씀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권면이 과연 정말 여성의 영적 리더십을 금지한 것일까요? 현재 교회학교 교사의 75%가 여성인데, 그럼 아이들에게는 누가 말씀을 가르칩니까?
제가 목회를 하면서 느낀 것 중의 하나는, 교회 행사의 실무적인 부분을 의논할 때, 남자 리더들과 의논하는 것보다 그 부인들과 상의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행사에는 음식 준비 등 여성분들이 담당해야하는 부분이 많은 것도 한 이유겠지만, 그것보다도 여성 특유의 어머니 리더십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하면, 어릴 때 뭐가 필요하면 아버지에게 이야기 하는 것 보다 어머니나 외할머니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실제적으로 도움이 될 때가 많습니다. 아버지는 일단 화부터 내시는 경우가 많지만 엄마는 자기가 희생해서 자식의 문제를 해결해주려고 합니다. 남자들은 대게 명분을 중시하고 체면이나 전체적 모양새에 주목해서 의견을 내는데, 여자분들은 상대방의 입장을 감성적으로 이해하면서 의견을 내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 안에서 여성의 영적 리더십을 찬성하는 입장입니다. 제가 만나본 여자 목사님들 중에 훌륭한 분들이 많습니다. 모성애와 목회가 만나면 잘 어울립니다. 또 명분보다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고 희생하는 ‘엄마 리더십’을 하나님께서 쓰실 때가 많은 것입니다. 남성은 남성 특유의 리더십 스타일이 있고, 여성은 여성 특유의 리더십 스타일이 있다고 봅니다.
그럼 바울이 말씀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구절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문맥을 봐야합니다. 고린도교회 안에 예언의 은사를 남용하는 일부 여성 예언자가 있었는데, 이런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고 먼저 남편의 권위를 인정하고 겸손을 먼저 배워야할 것이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여성의 교회 내 사역을 전면 금지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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