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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의 기도(왕상18:41-46) – 네이버 블로그
엘리야는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땅에 꿇어 엎드려 얼굴을 무릎사이에 넣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 …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3/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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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의 기도 (열왕기상 18:41-46) – Daum 블로그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 …
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4/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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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엘리야의 기도 – 온누리 신문
엘리야의 기도는 어떤 면에서 모범이 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적 세력들과의 대결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었다는 점입니다.
Source: news.onnuri.or.kr
Date Published: 12/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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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회복, 엘리야의 기도 – 기독신문
셋째, 엘리야의 기도는 축복이 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성전을 건축했다면 그 다음을 기대해야 합니다. 건축이 목적이 아닙니다. 건축은 본격적인 구원을 …
Source: www.kidok.com
Date Published: 1/1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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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설교] 엘리야의 기도 – 아이굿뉴스
열왕기상 18:36~39엘리야의 기도는 불의 응답을 간구하는 장엄하고 간절한 기도입니다. 비가 오기를 위해 기도를 한다면 몰라도 하늘에서 비가 아닌 …
Source: www.igoodnews.net
Date Published: 6/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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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음성을 많이 들은 것 같고, 엘리야도 기도를 통해 기적을 체험했다고 하는데 나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가라고 생각하는데 드러난 것만 보면 안 …
Source: www.sooyoungro.org
Date Published: 4/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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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의 일곱 기도 단계를 통한 7배의 영력 강화의 원리 (열왕기 …
엘리아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일곱 번 기도를 드린 일곱 기도의 단계를 통한 7배의 영력을 강화하는 원리를 알아보자. 1.
Source: www.christianreview.com.au
Date Published: 5/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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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엘리야의 기도 : 능력대결 > 예배와 말씀 – 지구촌교회
말씀본문 (열왕기상 18:20-40). 20.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로 사람을 보내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으니라. 21. 엘리야가 모든 백성 …
Source: www.jiguchon.or.kr
Date Published: 11/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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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엘리야 의 기도
- Author: 온누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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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9.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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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의 기도(왕상18:41-46)
성경/왕상18:41-46 제목/엘리야의 기도
● 무엇을 기도하십니까?
오늘 본문은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무엇을 기도합니까? 본문을 읽어 보면 엘리야는 하나님께 “비”를 달라는 기도입니다. 왜 “비”를 달라고 기도했을까요? 열왕기상17:1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엘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는 북 이스라엘의 7번째 왕 아합이 다스리던 때입니다. 그 아합의 시대를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29. 유다의 아사 왕 제 삼십 팔년에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니라.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사마리아에서 이십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30.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31.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32.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33.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왕상16:29-33)
이런 아합 왕의 시대에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하여 경고하십니다.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그 경고대로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습니다.(눅4:25, 약5:17) 그러니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피폐해졌겠습니까? 그 당시 상황을 보여 주는 것이 열왕기상 17장에 등장하는 사르밧 과부이야기입니다. 사르밧이란 동네에 사는 과부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서 한 움큼의 가루와 병에 기름 조금 있는 기름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고, 아들과 함께 죽으려고(왕상17:12) 했던 처지의 상황이 3년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던 상황을 잘 설명해 줍니다. 그러한 고난이 끝나기 위해서는 아합 왕이 섬기는 바알과 아세라 우상의 문제를 해결되어야 합니다.
● 갈멜 산에서의 영적 싸움
그래서 엘리야 선지자가 아합을 찾아가서 바알 선지자 400명, 아세라 선지자 450명을 갈멜 산으로 불러 어느 신이 참 신(神)인지 알게 하자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아합 왕은 정한 날에 온 백성들을 갈멜 산에 모으고,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와 엘리야 선지자의 영적인 싸움을 합니다. 제단 위에 나무를 놓고, 그 위에 송아지를 잡아 각을 떠서 놓고, 불을 지피지 않고 각자의 신에게 기도하여 불로 응답하면 그 신이 참 신(神)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아침부터 저녁 무렵까지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소리치고 난리치고 자기 몸을 칼과 창으로 상하게 하면서까지 기도했지만 아무 반응도 없었습니다.
해가 저무는 저녁 즈음에 엘리야는 12개의 돌로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나무를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제단 주변에 15리터의 물이 들어갈 정도의 도랑을 파고, 송아지를 각을 떠서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시켜 통 넷에 물을 가득 채워서, 각을 뜬 송아지와 나무에 부으라고 합니다. 한 마디로 엘리야가 쌓은 제단은 물로 흥건합니다. 그리고 엘리야 선지자가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왕상18:37)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열왕기상18:38“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그러자 사람들이 엎드려 소리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입니다!” 하나님이 “참 신(神)”임이 증명되자 그동안 이스라엘의 영적 문제의 원인이었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다 죽이게 합니다. 열왕기상18:40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 엘리야의 기도
이어서 오늘 본문에 엘리야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떤 기도입니까? “하나님께 비를 달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엘리야가 누구를 생각한 겁니까? 백성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잘 살아 보겠다고 하나님을 등지고 우상을 숭배합니다. 그것을 부추긴 것이 아합 왕입니다. 그 모습에 하나님은 3년 6개월 동안 가뭄을 주십니다. 그리고 갈멜 산의 영적 싸움에서 하나님이 참 신임을 증명됩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어떠냐! 이놈들아 너희가 버린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다. 바알과 아세라를 따르더니 꼴좋구나!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한 것이 얼마나 큰 죄인 줄 아느냐! 너희는 더 고통을 당해봐야 한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는 3년 6개월이란 가뭄 속에 힘들고 고난당했을 백성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비를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 이런 엘리야의 기도를 보면서 우리의 기도 모습을 살펴봅니다. 우리의 기도는 너무나 “나” 중심적인 기도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 교회, 내 가족, 내 문제, 내 자녀, 내 앞 날, 내 사업, 내 직장….” 너무나 나 중심적인 기도로 다른 사람들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기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를 서운하게 한 사람, 나를 아프게 한 사람, 나를 고난 가운데 빠지게 한 사람들이 내가 받은 것 이상으로 아프고 고난당하고 실패하기를 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물론 내 교회, 내 가족, 내 자녀, 내 사업, 내 직장, 내 문제를 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당연히 해야 할 기도입니다. 그러나 내 기도만하고 기도의 시간이 끝이 난다면 우리는 너무 이기적인 신앙 아닙니까? 그 이기적인 신앙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가 세상 사람들에게 지탄 받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오늘 엘리야의 모습을 보면서 더 넓게 기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 크게 기도해야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엘리야의 기도의 특징들이 있습니다.
첫째, 엘리야는 약속을 믿고 기도합니다.
엘리야가 비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18:1 “많은 날이 지나고 제 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엘리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고 하셨습니다. 엘리야는 그 말씀을 믿고, 지금 “비”를 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그냥 자기 욕심에 이끌려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들려주신 약속, 하나님이 보여 주신 약속에 근거하여 기도하고 있는 겁니다. 성경에서 보이는 기도의 응답의 모습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기도의 응답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신 이유는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라…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1:4-5)는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므로 응답 받은 것 아닙니까! 요셉이 긴 시간 동안 인내하면서 하나님께 무엇을 기도했겠습니까? “하나님이 보여주신 꿈이, 비전이 이루어지길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엘리야의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도했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즉흥적인 기도가 아니라 욕심에 의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성경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왜요? 약속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들려주시고 약속하시고 말씀하셨기에 성경 말씀을 알고 그 속에 담긴 약속을 붙들고 기도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5:14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둘째로 엘리야의 기도는 실제적인 기도입니다.
오늘 본문 42절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 가니라. 엘리야가 갈멜 산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엘리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는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땅에 꿇어 엎드려 얼굴을 무릎사이에 넣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그러나 약속을 믿음으로, 약속을 알고 있다고, 자동적으로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으로 실제적인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겔36:37) 하나님께서 분명히 약속해 주셨지만, 이루어주시기를 구하고 기도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믿고는 살지만, 약속을 기다리고는 있지만, 기도를 귀찮아합니다. 기도라는 것이 쉬운 것 같으면서도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도하기 위해서는 내 시간을 내놓아야 하고, 의도적으로 기도의 자리를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나는 무시로 기도합니다. 나는 장소에 구애됨 없이 기도합니다. 기도하는데 무슨 시간과 장소가 따로 필요합니까? 말하기도 합니다. 무시로 어디서든 기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기도의 모범을 보여 주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예수님은 시간과 장소를 따로 떼어 놓고 규칙적으로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22:39-41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40.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41.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그 약속을 믿고, 실제적으로 기도하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친히 보여 주셨고, 오늘 본문의 엘리야도 실제적으로 기도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엘리야의 기도는 끈기 있는 기도입니다.
엘리야 선지자의 기도라고 해서 기도하자마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43절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쪽을 바라보라 그가 올라가 바라보고 말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이르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엘리야가 기도하고 사환을 시켜 응답의 흔적을 찾습니다. 그러나 아무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자 엘리야는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고 하십니다. 그 만큼 오랜 시간 기도하였던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일곱 번까지 가라는 것은 응답될 때까지 기도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욕심을 관철하기 위해 응답될 때까지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욕심에 의한 기도는 응답되지 않습니다. 야고보서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엘리야가 일곱 번까지 가서 기도 응답의 흔적을 찾으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응답하실 때까지 기도해야 함을 말씀하는 겁니다.
엘리야도 일곱 번씩 기도하며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렸다면 하물며 평범한 우리가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을 내놓고 기도해야 하겠습니까! 그래도 위로가 되는 것은 기도에는 분명한 응답이 있다는 겁니다. 야고보서 5:17-18 “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18.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때까지 기도한 기도의 응답 내용이 어떻습니까? 오늘 본문 44-46절 “44.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그가 말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이르되 올라가 아합에게 말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45.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해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46.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 말씀을 정리해 봅시다. 오늘 엘리야의 기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엘리야를 통해 볼 수 있는 기도의 모습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기도하고, 실제로 기도하는 모습이 필요하고, 약속이 응답될 때까지 기도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 엘리야의 기도를 기억하시면서 날마다 하나님의 놀라운 기도의 응답을 맛보는 인생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엘리야의 기도 (열왕기상 18:41-46)
엘리야의 기도 (열왕기상 18:41-46)
엔젤라 헌트가 쓴 “ 세 그루의 나무 이야기 ” 가 있습니다 .
어느 산마루에 세 그루의 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그들에겐 각자 꿈이 있었는데, 첫째 나무는 금으로 입혀진 보석함이 되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석들을 담는 것이고, 둘째 나무의 꿈은 바다를 항해하는 군함이 되어 가장 높은 왕을 태우는 것이고,
셋째 나무의 꿈은 산마루에서 가장 높은 나무가 되어 사람들이 자신을 볼 때마다 하나님을 생각나게 하는 나무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 그루의 나무는 자신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어느 날 목수들이 와서 나무를 자르기 시작했습니다 .
첫째 나무는 금으로 입혀진 보석함이 되기를 소원했지만 애석하게도 말구유가 되고 말았습니다.
둘째 나무는 왕을 태우고 다니는 군함이 되기를 원했지만 초라하게도 작은 고깃배가 되었습니다.
셋째 나무는 산마루에 버티고 있기를 원했지만 사정없이 잘려져서 목수 집 뒤뜰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세 그루의 나무는 낙심에 빠졌습니다.
“이게 뭐야! 내 소원대로 되지 않았어. 그토록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는데도…”
수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말구유가 된 첫째 나무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분을 모시게 되었는데, 아기 예수께서 말구유에 뉘이신 것입니다.
그로부터 약 삼십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둘째 나무로 만든 어선에 만왕의 왕 되신 예수님이 오르셔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며, 많은 고기를 낚는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로부터 또 삼년 뒤 셋째 나무는 하나님의 아들을 매달은 채 갈보리 산 위에 우뚝 세워졌습니다.
이렇게 세 그루 나무의 소원은, 모두 다 그들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생각하는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과 그 때에 우리가 상상하는 것 보다 더 크게 그리고 더 분명하게 우리의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대로 우리들의 삶이 인도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본문에서 “ 엘리야의 기도 ” 를 통해 , 세 가지 정도를 함께 나누길 소망합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과 함께 영적전쟁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850:1의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 기도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
왕상 18:37-38 절을 읽겠습니다 .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하나님께서 불로 응답하셨습니다 .
그 응답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은 하루 종일 바알에게 기도하였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다가, 반대편에 홀로 서있는 엘리야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즉시로 응답을 하셨습니다.
이 기도의 응답을 눈으로 목도한 모든 백성들이 이제는 “그는 하나님이시다.”라고 시인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850명의 이방선지자를 모조리 잡아 죽입니다.
이러한 전쟁에서 승리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바로 이어지는 내용이 오늘 본문입니다.
엘리야의 기도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볼 수 있는 기도의 원리는 무엇이 있습니까 ?
1. 엘리야는 기도의 원리를 명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
41 절을 읽겠습니다 .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
엘리야는 아합왕에게 “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라고 강력하게 선포합니다.
이 모습에서 우리는 “엘리야가 승리의 흥에 심취해서 오버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렇게 생각하고 42절에 “엘리야가 땅에 꿇어 무릎사이에 얼굴을 넣고 기도하고 7번이나 기도했다.”는 기도의 모습을 바라볼 때, 우리는 어떤 착각을 하게 될 수 있을까요?
“아~ 오늘 본문을 보니까 엘리야가 먼저 일을 저지르고 난 후에 그 일이 안 이루어지면 어떻게 하지라고 걱정하며 간절하게 비를 주시옵소서라고 기도 했더니 비를 주시는구나. 나의 삶 가운데에서도 믿음으로 저지르고 보자! 그리고 마구, 마구 기도하면 다 하나님이 다 해결해 주실 거야~”라는 식의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엘리야의 선포는 그냥 내뱉은 말이었을까요 ?
엘리야의 선포는 철저하게 말씀에 의지한 선포였습니다.
당시 비가 올 수 있는 상황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 먼지가 날리는 건조한 상황에서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빗소리가 난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절대로 승리의 기쁨에 도취되어 날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
열왕기상 17 장 2 절 , 8 절 , 14 절을 보면 , 동일한 패턴의 문구가 반복되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시매…”입니다.
이 말씀에 바로 이어 나타나는 엘리야의 행동과 그 말씀에 순종하는 엘리야를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18:1 절을 읽겠습니다 .
“많은 날을 지내고 제 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41 절에 나타나는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라는 엘리야의 강력한 선포의 근거는 바로 18:1 절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엘리야의 선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비가 내릴 것입니다.
그런데 42 절을 보면 엘리야의 엉뚱한 행동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42-43 절을 읽겠습니다 .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쪽을 바라보라 그가 올라가 바라보고 말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이르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왜 엘리야가 기도했을까요 ?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는데, 그리고 그 확신 가운데 “큰 비의 소리가 있다.”라고 선포까지 했는데, 엘리야는 왜 느닷없이 기도한다고 혼자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는 것일까요?
엘리야가 걱정되어서 기도한 것일까요?
우리는 엘리야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기도의 원리”알게 됩니다.
엘리야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확실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기도했던 이유는 “그 약속이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기도라는 통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기도의 원리”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원리를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
아니 알면서도 모르는 양 살아갑니다.
주일날 설교를 통해서 많은 은혜들을 경험하고도, 왜 현실은 변하지 않은 것일까요?
눈물도 흘리고 은혜를 깊이깊이 받았는데, 왜 한 주간을 지나고 나면 맘속에 허전함만 남게 되는 것일까요?
이런 허전함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지게 됨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맘속으로 “은혜는 잠시 느끼고 스쳐 지나가는 거야. 늘 그래 왔잖아~!”라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다른 사람들에게 “기도해봤자야!”는 식으로 얘기를 합니다.
그들이 그처럼 반복적으로 은혜를 받고 다시금 식어지고 맹탕이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이유는, 약속과 징조만 느끼고 다음 작업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느끼고, 가슴속 깊이 절절하게 느끼고, 우리 삶에 영적인 빗소리는 들었는데, 기도를 통해 현실 가운데 이루어지는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겔 36:37 절을 읽겠습니다 .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떼같이 많아지게 하되”
에스겔 36:24-26 절까지 한 장 전체를 통해서 ,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
그런데 37 절에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루어길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원리”입니다.
기도의 통로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 우리 눈앞에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
말씀을 깨닫고, 예배를 통해서 자신에게 주시는 확실한 약속들을, 기도하지 않으면, 기도의 시간이 우리에게 없다면, 더 간절히 기도하지 않으면, 늘 패배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무리 부흥회를 참석하고, 눈물을 흘리고 목이 쉬서 와도 그 후에 기도하지 않으면, 현실과 상황에 넘어지는 연약한 우리는 결국“은혜를 받아도, 몇 칠을 못 간다.”라는 애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눈물 흘리고, 감격하고, 은혜 받았다고 고백한 후에 그냥 거기서 멈춰서면,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도 알듯이, 한 주가 지난 다음 주에는 또 다시 영적인 패배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여러분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기도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
우리는 기도란 영혼의 호흡이라고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연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설교를 통해 듣는 것이 있기에, 기도에 대한 정의는 누구보다도 명쾌하게 말하면서도, 정작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유일한 통로인 기도를 써야하는데 쓰지 않습니다.
마크 트웨인이 쓴 “ 거지와 왕자 ” 라는 동화책을 보면 , 거지 “ 톰 ” 과 왕자 “ 에드워드 ” 의 삶이 뒤바꾸어졌습니다 .
거지 “톰”은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옥쇄를 무식하게도 호두 까먹는데 사용하는 도구로 이해하고, 옥쇄를 망치처럼 사용하는 모습을 봅니다.
여러분! 옥쇄는 호두 까먹는 망치가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있어 호두 까먹듯이 장식품이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입니다.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입니다.
2. 엘리야는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
42 절을 통해 우리는 엘리야의 기도의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이 기도의 모습을 말로써 그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
기도 장소가 갈멜산이니까 아마 바닥이 울퉁불퉁했을 것이고, 거기다가 무릎사이에 얼굴을 짚어 넣으니까 몸의 무게가 무릎으로 갔을 것입니다.
따라서 무릎에는 자갈들이 박히고, 배가 땡기고 목이 엄청나게 아팠을 것 같습니다.
성경기자는 “우리에게 간절하게 기도하려면, 엘리야의 기도 스타일로 기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엘리야의 마음을 보여 줍니다.
이 말씀은 엘리야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열망하며, 얼마만큼 기도에 몰입하였는가를 말하여 주는 것입니다.
약 5:17-18 절에 엘리야의 기도모습을 한 단어로 “ 간절히 ” 라고 말했습니다 .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비를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다고, 마음을
푹 놓고 나태하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목이 타 들어갈 듯이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에서도 말씀을 부여잡고, 목이 타 들어갈 듯이 간절히 기도하는 기도의 시간이 많아지길 소망합니다.
3. 엘리야는 기도의 응답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
43 절을 읽겠습니다 .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 쪽을 바라보라 그가 올라가 바라보고 말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이르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우리는 수많은 설교를 통해 엘리야가 “ 일곱 번 기도했다 .” 고 들어 왔습니다 .
그러나 본문 어디를 살펴보아도 딱 부러지게 “일곱 번 기도했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다만 사환에게 “일곱 번까지 다시가라.”고 기록되어져 있을 뿐입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일곱”이란 숫자는 완전수로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엘리야가 사환에게 일곱 번까지 확인하라고 한 것은 18: 1 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강한 확신 속에서 끝까지 기다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불로 응답하실 때에는 단번에 응답하심을 경험하였는데, 비로 응답하실 때에는 하나님께서 즉시로 응답하시지 않고, 기도의 응답을 늦추시고 계십니다.
따라서 엘리야 역시 초조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은 의아해하며 “왜 무슨 일이 있는 것인가?”하는 웅성웅성거리는 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진실된 기도를 계속해서 했습니다.
44 절을 읽겠습니다 .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그가 말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니라 가로되 올라가 아합에게 말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하니라”
사환이 첫 번째 올라갔을 때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까지 올라가서 바다 편을 바라보았을 때는, 아무런 비가 올 증상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딱 일곱 번째 올라갔을 때에, 사환은 손만한 작은 구름을 발견하게 됩니다.
손만한 작은 구름이라는 것은, 정상에 오른 사환이 먼 하늘을 바라보고, 손바닥으로 가리워지는 작은 구름을 의미하는 것으로 구름이 얼마나 멀리 있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손만한 구름이 얼마 안 되어 온 하늘을 뒤덮고 온 땅에 비가 내렸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십니까 ?
이것은 우연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약속하신 것을 극적으로 성취하는, 극적 대 반전을 본문을 읽는 성도들에게 그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배와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약속들을 반드시 기도를 통해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때는 하나님이 정하신다는 것을 명심하시고, 그때가 이를 때까지 포기하지 말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비록 힘이 들고 우리의 상황이 어려울지라도 말씀을 부여잡고 일곱 번까지 즉 끝까지 기도하며, 준비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
오늘 우리는 엘리야의 기도를 통해서 기도의 원리를 다시금 세우자는 것입니다.
단순히 감정적으로 욱하는 것에만 그치지 말고 , 그 말씀을 부여잡고, 목이 타들어가듯이 간절한 마음으로 인내하며 끝까지 기도하는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기도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
예배를 통해 말씀을 받고, 감동을 받은 후에, 그것이 내 삶 가운데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도의 통로가 필요함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일평생 패배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믿고 간절히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기도의 폭발력을 경험하며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주일강단-엘리야의 기도
제1242호
엘리야의 기도
왕상 18:29~40
이재훈 목사
엘리야의 기도는 어떤 면에서 모범이 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적 세력들과의 대결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었다는 점입니다. 이 시대도 엘리야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적 세력들이 세상에 가득합니다. 이 땅은 진공 상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와의 대결과 전쟁 속에 우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의 기도가 참 귀합니다. 엘리야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이 시대에 드러내기를 소원합니다.
엘리야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왕 시대에 하나님의 징계를 예언하도록 부름 받은 선지자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7대 왕이었던 아합왕은 그 어떤 왕보다 악하게 우상숭배에 치우쳤던 인물입니다.
“아합과 같이 여호와의 눈앞에 악을 행하려고 자기 자신을 판 사람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그를 충동질했기 때문입니다”(왕상 21:25).
우상숭배에 빠져있던 이세벨의 충동질을 이겨낼 수 없었던 아합왕은 ‘자기 자신을 팔았다’고 표현할 만큼 영혼이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땅에 진노하셨고, 그 진노로 3년 반 동안이나 극심한 기근을 내리셨습니다. 그것을 예언하도록 부름 받은 자가 바로 엘리야입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징계가 임했다면 백성들이 아합왕부터 회개하고 돌이켜야 하는데 그 누구도 회개하지 않았고 돌이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백성들이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머뭇거린다’는 것은 두 마음을 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상 모두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또 ‘머뭇거리다’는 단어는 정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정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머뭇거리는 백성들 앞에서 엘리야가 강하게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3년 반의 기근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이 있을 때도 돌아오지 않았고, 기근이 극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아합왕을 비롯한 백성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는 아합왕에게 기근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을 전달하는 책임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예언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충격적인 요법
“엘리야는 우리와 본성이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더니 3년 반 동안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도했더니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땅이 열매를 냈습니다”(약 5:17~18).
야고보서는 행함에 대하여 강조하는 책이지만 기도에 대해서도 강조를 많이 합니다. 1장에서는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지혜를 구하라”고 말씀하셨고, 5장에서는 “병든 자가 있느냐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고침을 받을 수 있다”, “함께 기도하라”, “죄를 고하고 기도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의 별명이 ‘낙타무릎’입니다. 너무 기도를 많이 해서 무릎이 낙타처럼 되었다는 뜻입니다. 무엇이 야고보가 낙타무릎이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기도의 사람이 되게 했겠습니까? 바로 엘리야입니다. 야고보는 엘리야를 본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예언을 전하는 책임만이 아니라 예언대로 이루어질 것을 기도했고, 회복이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전도서 8장 11절을 보면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악에 대하여 바로 보응하지 않으시기에 사람들이 악을 행하기에 담대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200여 년 동안 죄악으로 치우쳤지만 하나님은 오래 참으셨습니다. 그 가운데 절정이었던 아합왕 시대에 머뭇거리고 있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충격적인 요법을 사용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때로 우리가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 머뭇거리고 있을 때 하나님이 크게 한 번 치시고, 우리를 다시 살리기 위해 고통 속에 넣으실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런 사건이 오늘 본문 열왕기상 18장에 나옵니다.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 머뭇거리고 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엘리야를 통해 충격을 주셨습니다. 이 시대에도 이러한 충격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결을 도전하는 엘리야
“엘리야가 온 백성들 앞에 나가 말했습니다. ‘너희가 이 둘 사이에서 얼마나 더 머뭇거리겠느냐? 여호와가 하나님이시면 여호와를 따르라. 그러나 바알이 하나님이면 바알을 따르라.’ 그러나 백성들은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왕상 18:21).
엘리야의 촉구에 대꾸하지 않은 것은 거부를 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충격적인 역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바알을 숭배하는 선지자 450명, 아세라 숭배자 400명을 모두 갈멜산으로 모이도록 해서 백성들 앞에서 자신과 대결할 것을 도전했습니다. 아세라 선지자들은 이세벨이 반대해서 모이지 않았지만 바알 선지자 450명이 갈멜산에 모였습니다. 갈멜산은 1,740피트 높이에 동서남북으로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산입니다. 과거에 갈멜산에서 하나님을 경배했던 적이 있는데 아합 시대에는 우상이 가득한 산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엘리야는 우상에게 빼앗겨 버린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거룩한 임재하심을 나타내기를 원했습니다. 엘리야가 “두 마리의 소를 가져와서 한 마리씩 택하고, 그 소를 각을 떠서 제단에 올려놓고, 불을 붙이지 않고 자신들이 하나님이라고 믿는 그 신에게 구해서 불을 내려주는 신이 진짜 신임을 증명하자”고 백성들에게 대결 방법을 제안했습니다. 백성들은 좋다고 했습니다. 불로 임하시는 신이 진짜 하나님이심을 고백하자는 것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좋다고 한 이유는 바알이라는 신이 가나안 땅의 태양신이었고, 날씨와 풍요를 주관한다고 믿었고, 때로는 천둥과 번개를 통해 일한다고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말대로 바알이 진짜 신이라면 천둥과 번개를 내릴 뿐만 아니라 불을 일으킬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엘리야가 그들이 믿는 신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엘리야는 바알 숭배자에게 순서를 양보했습니다. 바알숭배자들이 바알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라고 구하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한 유대 역사가는 당시 바알을 숭배하는 의식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바알 숭배자들은 처음에는 비교적 온건한 태도로 부르짖었으나 그 다음에는 몸을 앞뒤로 흔들어 대며 제단 주위를 뛰어다녔다. 그들의 외침은 더욱 커졌고, 춤도 더욱 격정적으로 변해갔다. 그들은 원을 그리며 선회했고 미친 듯이 가로질러 뛰어다녔다. 그들은 항상 머리를 숙여 길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으로 땅바닥을 쓸어대며 원을 그리며 움직였다.”
백성들이 광란의 몸짓을 하며 부르짖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때 엘리야가 이렇게 조롱합니다.
“정오가 되자 엘리야가 바알 예언자들을 비웃으며 말했습니다. ‘더 큰 소리로 하라. 그가 신이니 아마 깊은 생각에 빠졌거나 너무 바쁘거나 여행을 떠났나 보다. 어쩌면 자고 있을지 모르니 깨워야 되지 않나 싶다’”(왕상 18:27).
엘리야의 조롱에 자극을 받은 바알숭배자들은 자해하며, 피를 흘리고, 몸을 상하게 하며 응답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바알은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바알이라는 존재가 만들어진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바알을 숭배하는 자들의 모습을 통해서 인간이 만들어내는 거짓 종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거짓 종교는 인격적인 관계없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무조건 간절히 구하고 떼쓰기만 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응답을 만들어가려는 것은 거짓된 종교 신앙입니다.
둘째, 거짓 종교의 특징은 소수의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비밀 기호 같은 것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중세 교회가 “성경은 누구나 읽고 해석할 권리가 없고 사제만 있다”고 한 것은 거짓된 종교화 된 것입니다. 소수의 특권층만이 알 수 있는 비밀 기호는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고, 모든 사람이 해석할 수 있고,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진리입니다.
셋째, 거짓 종교의 특징은 자신을 불행하게 학대함으로써 신으로부터 응답을 더 빨리 받아낼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신의 동정을 얻어내는 것입니다. 바알숭배자들이 부르짖을 뿐만 아니라 뛰어다니고, 자신의 몸을 학대하고 피를 흘리면서 응답을 받아내려고 합니다. 거짓입니다. 거짓 종교의 흐름을 보면 결국 자신을 학대하는 쪽으로 갑니다. 가정을 파괴하고,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림으로 신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모두 거짓입니다. 신실하다고 해서 거짓이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 종교에도 신실함이 있습니다. 열심이 있습니다. 충성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거짓이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는 내용이 진리인지가 중요합니다. 악한 자도 효과적으로 악해지기 위해서는 선한 것을 사용해야 합니다. 열심, 신실함, 충성은 모두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대상이 거짓이라면 그것은 거짓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 역사의 마지막 걸림돌
참된 구원의 역사에서 마지막 걸림돌은 사실 종교입니다. 조심해야 할 것은 우리 안에도 있는 종교성이 참된 복음의 진리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9세기 노르웨이의 복음주의 신학교에 오 할레스비(Ole Hallesby)라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이분이 쓴 이라는 책은 ‘종교와 기독교’라는 장으로 마무리 됩니다. 기독교 안에 있는 종교성이 복음의 마지막 장애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책 문구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종교적임으로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열광과 광신의 모든 위험을 피해온 유일하게 참된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이 참 기독교에 대하여 얼마나 모르는가는 그들이 그리스도가 생명이 되신 사람과 접촉할 때 가장 명백하게 나타난다. 그들은 그런 사람의 삶이나 간증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삶은 그들에게는 과장과 극단으로 가득한 편협한 삶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들은 참 크리스천이 하나님을 믿는 일과 관련해서 기쁨, 슬픔, 불안, 고통에 대해 말할 때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마치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 더 간단한 일이 어디 있느냐는 태도를 가진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죄, 회개, 유혹, 악마, 영적 전쟁 이 모든 것에 대해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저 내 마음이 편해지려고 가는 것이고, 내가 필요할 때 도움을 받으려고 하고,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다는 종교적 생활을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C.S.루이스는 이러한 영역을 ‘물 탄 기독교(Christianity-and-water)’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물 탄 기독교와 같이 그저 종교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눈에 띄는 바알을 숭배하는 거짓 종교, 사이비, 이단들도 있고, 믿는 우리 안에 있는 물 탄 기독교와 같은 생각, 천국과 지옥, 회개, 심판, 재림, 영적 전쟁 모든 것에 대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나 하나님 믿어. 예배에도 출석해. 필요할 때 기도해. 그러면 됐지. 더 이상 요구하지 말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성을 통해 참된 기독교에 물을 타 버리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안에도 우상이 들어와 있고, 물 탄 신앙이 되어버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도는 최선의 수단, 최초의 수단
이제 엘리야의 순서가 됐습니다. 엘리야는 맨 처음 무너진 단을 열두 개의 돌로 다시 수축합니다. 왜 열두 개의 돌이냐면 역사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엘리야의 믿음은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생각해 낸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 열두 지파를 통해 역사 속에 실제로 나타나신 하나님, 실제적으로 기적을 베푸신 하나님, 출애굽의 역사, 광야 여정의 역사, 이스라엘 민족의 다윗과 솔로몬을 통해 역사 속에 실재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오늘날 믿음도 무엇인가 잘 해보자고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역사가 포함되어 있고, 장구한 역사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증명된 믿음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성경은 한 사람이 쓴 것이 아닙니다.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은 수많은 역사 속에서 검증의 과정을 거쳤다는 것입니다. 성경만큼 오랜 역사의 검증을 견뎌온 책이 없습니다. 오랜 역사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증거하고 있는 책입니다. 엘리야가 바로 이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 다음에 주변에 도랑을 만들고, 번제물을 올려놓고, 그 도랑에 4개의 통으로 물을 3번을 부었으니 12통을 부은 것입니다. 왜 물을 부었을까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불이 잘 붙으려면 말라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물을 부었다는 것은 자연적으로 불이 붙기 어렵게 해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의 불이 임한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라면 물이 있다고 붙지 않겠습니까? 물을 다 태워버릴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엘리야는 매우 간결하지만 간절하고 단순하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즉각적인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응답이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간결하지만 담대한 믿음의 기도를 보십시오.
“저녁 곡식제사를 드릴 시간이 되자 예언자 엘리야가 제단 가까이 나와서 말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과 제가 주의 종이며 이 모든 일을 주의 명령으로 했음을 오늘 알려 주십시오. 여호와여, 내게 응답해 주십시오. 오 여호와여, 응답하셔서 주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시는 분임을 이 백성들이 알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여호와의 불이 내려와 번제물과 나뭇가지와 돌과 흙을 태웠고 구덩이에 고인 물마저 다 말려 버렸습니다(36~38절).
오랜 시간 외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을 해치치도 않았습니다. 간결한 그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온전한 헌신이 있습니다. 자신은 완전한 종이라고 고백하는 겸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갈망하는 간절함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엘리야는 기도를 최후의 수단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최선의 수단, 최초의 수단으로 기도했습니다. 갑자기 기도할 때 “이제는 기도밖에 없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단어 속에는 기도가 최후의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믿음이지만 엘리야의 간구는 아닙니다. 엘리야는 최초의 수단이요, 최선의 수단이 기도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엘리야의 모든 과정은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에서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했습니다. 그 의인은 단순히 예수님을 믿고 의롭게 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엘리야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과 동행한 의인의 삶 속에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힘이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기도에 불로 응답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과 물까지 태우므로 임하셨습니다. 불이 임한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토록 머뭇거리고 있었던 백성들의 마음,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며, 머뭇거리며 우유부단하던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됐다는 것입니다.
“온 백성들이 이것을 보자 엎드려 소리쳤습니다. ‘여호와, 그분이 하나님이시다. 여호와, 그분이 하나님이시다’”(39절).
하나님은 엘리야가 얼마나 위대한지 보여주기 위해 불로 응답하신 것이 아닙니다. 충격적인 사건이 있어야 우유부단하게 머뭇거리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우리 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는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믿음의 사람인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실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런 기도가 필요한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머뭇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 안에도 머뭇거리고 있는 두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도 엘리야 시대처럼 죄로 강퍅해지고,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있습니다. 이 시대에도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엘리야의 기도는 귀한 기도요, 우리의 모범이 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영적 대결에서 승리하는 기도가 우리 삶에도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살아계시는구나”라고 말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 기도를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email protected]
영성회복, 엘리야의 기도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기도자 7000명이 됩시다
▲ 최남수 목사(의정부 광명교회)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엘리야의 기도에서 다섯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자신을 기도의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엘리야는 남은 자입니다. 여호와의 선지자 중에 엘리야만 홀로 남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남은 자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외롭게 농어촌에서 사역하는 목회자들을 향해 하나님은 “너는 남은 자”라 말씀하십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 올라갈 때 사람들은 그가 죽으러 올라간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이기 위해 당당하게 자신을 갈멜산의 제물로 올려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단번에 제물로 드렸습니다. 이 시대에는 자신을 제단에 제물로 올려드리는 제물기도자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제물입니다. 남은 생애 내 안에 있는 기도를 쏟아부어야 합니다. 내 기도로 이 민족을 살려 달라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진짜는 불이 임합니다. 갈멜산에서 제물을 태우기 위해 불이 임했습니다. 우리를 제단에 제물로 드리면 하늘문이 열리고 불이 임합니다. 그러나 가짜에는 불이 임하지 않습니다. 가짜가 진짜같이 보일 수는 있지만 불은 임하지 않습니다. 불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입니다. 불은 눈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마음의 평강으로 임할 수도 있습니다. 갈멜산의 엘리야에게는 가시적인 하나님이 필요하시기 때문에 보이는 불로 임하셨습니다. 불이 임하는 기도가 한국교회강단 위에 임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엘리야의 기도에는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내일이 없었습니다. 오늘 임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밤 여기서 기도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셋째, 엘리야의 기도는 축복이 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성전을 건축했다면 그 다음을 기대해야 합니다. 건축이 목적이 아닙니다. 건축은 본격적인 구원을 일으키는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목사장로기도회를 마치고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기대합시다. 우리가 기도한대로 될 것입니다. 엘리야는 영적승리 후에 승리감에 도취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도하는 목회자들은 기도할 때마다 큰 비의 소리를 듣습니다. 큰 비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오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넷째, 큰 비를 만드는 기도를 일곱 번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지금은 작은교회이지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우리 교회가 민족을 넘어서고 세계까지 이를 것입니다. 교회는 커도 기도가 부족한 것을 많이 봅니다. 기도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일곱 번 기도해야 합니다. 일곱 번 기도한 끝에 역사가 일어납니다.
다섯째, 기도자 7000명을 세워야 합니다. 기도자도 지칠 때가 있습니다. 40일 금식기도를 한 기도자도 지칠 때가 있습니다. 다음 단계로 기도의 동역자 7000명을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민족의 대안은 기도자 7000명 비전입니다. 영적으로 타락한 시대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준비해놓으신 7000명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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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설교] 엘리야의 기도
김원춘 목사 / 세계로열린교회 담임
| 열왕기상 18:36~39
엘리야의 기도는 불의 응답을 간구하는 장엄하고 간절한 기도입니다. 비가 오기를 위해 기도를 한다면 몰라도 하늘에서 비가 아닌 불이 내리는 것이 아합 왕을 비롯해서 모든 백성들의 생각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삶의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우선순위를 무시하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에서 비가 온들 그것으로 일회성 문제는 해결될지 모르지만 지속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더 큰 문제를 안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우로(雨露)가 내리지 않고 가뭄으로 인하여 흉년이 들고 아사(餓死)하는 사람과 짐승들이 많았습니다. 그로 인하여 정상적인 삶이 무너졌다면 백성들이 자기의 죄악을 하나님께 회개하고 죄를 사함 받았어야 함에도 왕을 비롯한 고관들이나 백성들이 하나님께 회개하기는커녕 원망하고 오히려 그 문제의 해결을 우상에게서 찾았다는 것이 문제 중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이 문제의 해결 방법을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를 통하여 비가 먼저가 아니라 세상을 주관하시고 사람의 삶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하시고 정상적으로 바로 새워야 할 때라고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를 통해 하늘로부터 불이 임하는 내기를 하게 했고 그 자리에 선 엘리야는 이 모든 것에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기도하게 된 것입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어떤 기도였습니까?
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가증한 우상숭배가 만연하였고 이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모독을 당하는 실정이었습니다. 엘리야는 당시의 세태에 대해 개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 누구일지라도 내가 분명 하나님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2. 백성의 회개와 구원을 간구하는 기도였습니다.
엘리야는 개인적인 감정이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이 세워주신 나라 이스라엘의 백성다운 삶을 갈구하는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백성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며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 수만 있다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3. 조상 대대로 이어져 이스라엘의 전통 신앙을 상기시켰습니다.
엘리야의 이런 모습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부모형제 일가친척 고향산천을 미련 없이 뒤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신 꿈의 세계로 떠나간 아브라함을 기억하게 합니다. 마음만 먹으면 죽음을 벗어날 수 있음에도 하나님의 원하심이기에 자기를 번제로 드릴 수 있도록 손과 발을 내밀어 죽기를 선택한 이삭을 생각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음을 믿고 밤새도록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하는 야곱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 모두 엘리야와 같은 신실한 신앙인, 진실한 기도자, 하는 일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주 안에 삶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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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엘리야의 기도 : 능력대결 > 예배와 말씀
말씀본문 (열왕기상 18:20-40)
20.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로 사람을 보내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으니라
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22.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
23. 그런즉 송아지 둘을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그들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말며 나도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않고
24.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하니라
25.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붙이지 말라
26. 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27.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28.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
29. 이같이 하여 정오가 지났고 그들이 미친 듯이 떠들어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르렀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나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
30.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그에게 가까이 가매 그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
31.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엘리야가 돌 열두 개를 취하니 이 야곱은 옛적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32.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제단을 쌓고 제단을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둘 만한 도랑을 만들고
33.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34.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째로 그리하라 하여 세 번째로 그리하니
35. 물이 제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 찼더라
36.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40.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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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주제에 대해 자주 검색하는 키워드 [이재훈 담임목사 주일설교] 2019.04.14 엘리야의 기도 (열왕기상 18:29~40) @ 온누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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